10부. 3G 삼국정립
2003년 6월 4일. 정보통신부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회에서 지지부진한 IMT-2000에 대한 정책 변경을 알렸다.1)
SK텔레콤과 KTF가 추진 중인 WCDMA에 대해 연말 상용화를 추진하고 시 단위 서비스를 2006년 6월까지 실시하도록 허가조건을 연기해 준 것. 동기식 사업자인 LG텔레콤은 2004년 말까지 현재 서비스 중인 PCS 대역에서 CDMA 2000 1x EV-DV 서비스를 추진하는 한편, 2006년 6월까지 IMT-2000으로 부여받은 2GHz 주파수 대역으로 기 서비스를 확장하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정부의 바람과는 달리 시장 상황은 LG텔레콤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퀄컴이 EV-DV 칩 개발을 로드맵에서 제외한 것이 결정타였다. 단말이 없으니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할 이유가 없었다. LG텔레콤은 차선책으로 동일한 칩을 개발 중인 비아텔레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EV-DV에 도전하는 곳은 우리나라, 그 중에서도 LG텔레콤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네트워크 기술 측면에서는 다른 대안이 제시됐다. SK텔레콤과 KTF가 2G CDMA를 발전시킨 CDMA2000 1x EV-DO(리비전.0) 상위 호환 버전인 EV-DO(리비전.A)로 나아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다만, 이 길을 걷기 위해서는 사업변경 허가신청을 해야 한다. 이미 한 번의 사업변경이 이뤄진 상황. 즉, 기술은 적용할 수 있으나 행정절차상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예외는 없기에 통과를 바랄 수도 없었다.
약속된 시간이 턱밑까지 차올랐으나 상황은 더 악화됐다. 2004년 7월 퀄컴이 최종적으로 EV-DV 칩 개발을 드롭했다. 본래 공급받기로 한 퀄컴의 MSM6700 통신칩이 허공 위로 사라진 순간이다. LG텔레콤은 차선책으로 비아텔레콤 칩을 활용했으나 이미 시스템 오류를 겪어 어려움에 빠진 상태였다. 퀄컴이 포기를 선언했으니, LG텔레콤으로서는 비아텔레콤에 기대 시스템 오류를 해결하는 방안이 유일할뿐이었다.2)
객관적인 정황 상 LG텔레콤의 허가조건인 ‘2004년 말 1.8GHz 주파수 대역 EV-DV 상용화’은 결과적으로 지키기 못할 약속이었다. 그나마 서울 강서구 1개 동을 대상으로 기지국 1개와 관련시스템, 단말기 200여 대를 회사 차원에서 시험적으로 운영한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이 마저도 LG텔레콤이 수백억 원을 투자해 이뤄낸 성과였다.3)
돌고 돌아 LG텔레콤의 남은 카드는 행정절차가 막힌 'EV-DO 리비전.A' 사업 변경 요청 뿐이었다. 처지가 곤란했으나 사정은 정보통신부도 다르지 않았다. 허가서 상으로 단 한 번만 사업변경이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었고, 이미 그 조건을 써버린 후였다. 사정이 딱하다고 해서 원칙을 바꿀 순 없었다. 게다가 LG텔레콤을 위해 예외 조항을 둔다면 그에 따른 특혜 시비부터 해결해야 했다. 특히 '특혜 시비'는 과거부터 몸서리치게 당해온 악재였다.
게다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오른 ‘CDMA2000 1x EV-DO 리비전.A’는 SK텔레콤과 KTF가 상용화한 EV-DO 리비전.0의 상위버전으로 2G CDMA를 이은 적통으로 해석됐다. 이 말은 LG텔레콤이 EV-DO 리비전.A를 도입하더라도 2G를 진화시켰을 뿐 3G에 해당되는 동기식 IMT-2000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즉, LG텔레콤이 따낸 동기식 IMT-2000에 리비전.A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LG텔레콤은 동기식 IMT-2000을 위한 2GHz 주파수를 할당받았다. 다시 말해 LG텔레콤은 기존 1.8GHz 주파수뿐만 아니라 2GHz 대역에서도 2G를 그대로 서비스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 사업권을 따냈는데 조건을 지키지 않고 주파수만 가져간 양심 없는 기업으로 손가락질 받을 수도 있었다.
결국, 정보통신부는 법률자문을 거쳐 강동구 1개 동에서 실시한 시험운영은 사내 테스트 수준으로 판단해 허가조건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외부조건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투자 역시도 미비했다는 점을 꼬집었다.4)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LG텔레콤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5) 행정적으로 어려웠던 기술방식 변경 요청을 받아들인 것. 2005년 5월 4일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회에서 해당 내용을 승인하고, 리비전.A 방식 서비스가 가능함을 알렸다. 앞선 사내 테스트는 경고 조치로 일단락했다. 대신 리비전.A에 대해서는 2006년 말까지 반드시 상용화할 것을 부가조건으로 내걸었다. 정부로서는 대승적 판결을 내린 셈이다.
LG텔레콤은 즉각 환영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속을 뜯어보면 완전히 손을 들어준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동기식 IMT-2000 추진에 대해서는 원칙이 고수된 점이 발목을 잡았다. LG텔레콤의 기존 PCS 대역인 1.8GHz 주파수에서 CDMA2000 1x EV-DO 리비전.A를 도입할 수 있도록 사업변경 허가를 내준 것이지, 2GHz 주파수에서도 동일한 기술을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즉, 동기식 IMT-2000 추진은 별도로 요구됐다. 반은 풀렸지만, 반은 그대로였다. 요약하자면 시간을 좀 더 연장해준 것과 다름 없었다.
LG텔레콤은 이 부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해외 어디에서도 동기식 IMT-2000 추진 사례가 거의 없기에 동기와 비동기간의 경계가 없음을 재차 주장했다.
이러한 LG텔레콤의 주장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LG텔레콤이 리비전.A를 기존 PCS 대역뿐만 아니라 IMT-2000 대역에서도 도입할 수 있다는 의미는 경쟁사도 동일하게 도입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내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즉, SK텔레콤과 KTF에게는 또 다른 기회였다. 양사는 CDMA2000 리비전.0을 서비스 중이기에 '리비전.A'에 대한 승인만 떨어진다면 언제든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상태였다.
특히 SK텔레콤의 리비전.A 도입은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황금주파수라 불린 800MHz 대역을 쓰고 있었기에 리비전.A 도입은 LG텔레콤뿐만 아니라 KTF 역시도 막아야 하는 난제였다.
SK텔레콤이 리비전.A를 도입하려면 우선적으로 사업변경 승인을 받아야 했기에 정통부는 신중하게 생각을 거듭했다. WCDMA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CDMA 망투자에 나선다는 점에 대해 정통부로서는 달가운 얘기는 아니었다.
서로가 눈치를 보는 동안 SK텔레콤이 먼저 선수를 쳤다. 2006년 1월 24일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을 통해 리비전.A 투자를 검토하기는 했으나 도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그에 따른 투자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6) 굳이 정무적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SK텔레콤이 포기를 선언하자 LG텔레콤은 긴 한숨을 들이켰다. 큰 고비를 넘기기는 했으나 2GHz 대역 동기식 IMT-2000 상용화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의지는 꺾였다. IMT-2000 투자도 소극적으로 집행됐다. 그만큼 신뢰도 떨어졌다. 투자 없는 사업 유지는 공공 자원인 주파수를 할당받은 사업자로서 직무유기에 해당됐다.
LG텔레콤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7) 2006년 7월 4일 창립 10주년 기자간담회장에서 동기식 IMT-2000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미 동기식 IMT-2000의 상용화 기일인 2006년 6월은 지난 시점이었다. 간담회가 시작된 날 조차 허가조건을 위반한 때였다.
이 자리에서 남용 LG텔레콤 사장은 IMT-2000에 대해서는 정부방침을 기다리는 한편, 1.8GHz 주파수 대역 리비전.A에 집중하고, SK텔레콤으로부터 800MHz 주파수 로밍을 요청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외부 환경 제약으로 인해 동기식 IMT-2000을 추진할 수 없다는 동정론도 일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LG텔레콤이 그간 추진해 온 투자 보류와 사업변경, 주파수 로밍 요청 등은 이동통신 사업을 영위하겠다는 의지가 빈약하다고 판단했다. 정책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정보통신부도 지적을 피할 수 없었다. 위반에 대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듯 보였으나, 미래를 제대로 예단하지 못한 정책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2006년 7월 12일 후속조치를 위해 정보통신정책심의위원회가 열렸으나 쉬이 결론이 나지 않았다. 사업자 의견을 듣기 위해 14일 다시 위원회가 소집됐다. 그리고 LG텔레콤의 IMT-2000 사업권은 허가 취소 결정이 내려졌다.8)
문제는 사업권 취소로 인해 LG텔레콤 대표인 남용 사장이 퇴임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전기통신사업법 제6조 2 제1항 6호에 따르면 ‘사업 허가를 취소당하거나 폐지 명령을 받은 경우 해당 임원과 대표자는 임원이 될 수 없으며 당연히 퇴직한다’고 규정돼 있다. 2002년 하나로통신이 와이브로 사업권을 반납할 때 그에 따른 페널티가 없다고 해 개정된 법률안이 LG텔레콤을 직격한 첫 사례였다.
심의위원회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남용 사장에 대해 선처를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위원회는 의견을 제시할 뿐 최종 판단은 행정부인 정보통신부의 몫이었다. 정보통신부의 입장은 명확했다. 소위 ‘법대로 하자’였다.
일부 책임론에서 빠져 나갈 수 없는 정보통신부가 강경하게 나가자 업계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책 실패를 사업자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위원회 의견을 무시하고 남용 사장까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것은 행정부의 이기적 판단일 뿐이라 호소했다.
하지만 모두 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준형 정보통신부 장관은 7월 19일 오전 11시 LG텔레콤 동기식 IMT-2000 사업 포기와 관련한 정책발표회를 열고 LG텔레콤에 대한 사업 허가를 취소한다고 밝혔다.9) 아울러 주파수 회수와 시기, 납부방법, 그리고 남용 LG텔레콤 사장도 법률에 따라 퇴직 효과가 즉시 발생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떠나는 남용 LG텔레콤 사장은 덤덤했다. 일자리에서 마지막 퇴근 전 그가 남긴 사내 게시판 글을 살펴보면 당시 심정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다.10)
“일각에서 제 거취 문제와 관련해 논란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의 이번 결정은 고객, 주주, 회사의 이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결국은 정부의 정책 실패가 원인이었다는 식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습니다만, 이는 결코 올바른 시각이 아닙니다. 사업권 취소라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기까지 정통부의 모든 분들이 온갖 방법을 다 모색했고 이런 파국을 막으려 애써준 것이 사실입니다…LG텔레콤이 정통부의 정책목표인 3강으로 우뚝 서는 것만이 진정으로 은혜를 갚는 길일 것입니다.”
1) 이성주 기자, <LGT, IMT-2000서비스 06년 6월 개시명령>, 머니투데이, 2003. 6. 4.
2) 강희종 기자, <LG텔레콤 "EV-DV 퀄컴칩 안쓴다">, 아이뉴스24, 2004. 7.18
3) 백용대 기자, <LGT, EV-DV 시험서비스 수준>, 디지털타임스, 2005. 1.26.
4) 강희종 기자, <"LGT IMT2000 허가조건 위반"…4월 정책심의회에서 제재 결정>, 아이뉴스24, 2005. 3.17.
5) 윤휘종 기자, <동기식 IMT-2000 기술방식 변경...정책심의위>, 아이뉴스24, 2005. 5. 5.
6) 안길섭 기자, <[SKT 컨퍼런스콜]“EV-DO 리비전A 투자 계획없다”>, 디지털데일리, 2006. 1.24.
7) 박영례 기자, <[일문일답] 남용 LG텔레콤 사장>, 아이뉴스24, 2006. 7. 4.
8) 정경미 기자, <정통부, “법대로 처리하겠다”>, 디지털데일리, 2006. 7.14.
9) 안길섭 기자, <남용 LGT 사장, 경영일선서 ‘퇴출’>, 디지털데일리, 2006. 7.19.
10) 허원 기자, <남용 LG텔 사장 “3강으로 정통부 은혜갚자”>, 파이낸셜뉴스, 2006. 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