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텔레콤이 하나로텔레콤을 인수하고 KT가 KTF와의 합병을 추진하자 LG그룹 통신 삼형제인 LG텔레콤과 LG데이콤, LG파워콤의 합병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초기 합병 시나리오는 LG의 자회사인 LG데이콤이 손자회사인 LG파워콤을 합병하는 방안이 부상했다. 유선통신 시장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곳이었기에 이전부터 줄기차게 합병이 거론됐다. LG데이콤은 인터넷전화 시장에서 LG파워콤은 초고속인터넷 시장의 주자들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너지를 내기에 충분했다.
다만, LG데이콤이 파워콤을 품기에는 한 가지 큰 걸림돌이 있었다. LG그룹이 보유한 LG데이콤 지분은 30%, LG데이콤이 보유한 LG파워콤의 지분은 45.3%. 이외에 파워콤 지분을 보유한 2대 주주는 한전으로 무려 43.1%를 소유하고 있었다. SK텔레콤이 5%를 가진 상태였으나 한전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에서 LG데이콤과 파워콤 합병론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지만 시기 특정이 매우 어려웠다.
결정적 계기는 2008년 8월 20일 발생했다. 정권 교체와 함께 반년 가량 공석이던 한전의 새 수장 자리가 채워졌다. 바로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이 앉은 것.1) LG그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LG데이콤과 LG파워콤의 합병에도 긍정적인 신호로 풀이됐다.
게다가 8월 27일 한전이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의 경영효율화 측면에서 LG파워콤의 지분을 매각하겠다고 나서면서 추정은 곧 사실화됐다.2) 9월 3일 LG파워콤이 기업공개(IPO)를 위해 증권선물거래소에 주식상장예비심사청구서를 제출했으며, 12월 말 거래소 상장이 가능해지면서 데이콤과의 합병 역시 당연한 절차로 인식됐다.
또한 10월 9일 인터넷전화 가입자 100만 돌파 기념식에 나선 박종응 LG데이콤 사장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두 회사의 합병을 추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을 피력하면서 합이 맞아떨어졌다. 3)
하지만 역시나 시기가 문제였다. 예상보다 빨리 LG파워콤이 11월 27일 코스피 시장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주가를 롤러코스터를 타듯 위아래를 넘나 들었다.
일각에서는 LG텔레콤도 LG데이콤, LG파워콤과 합병될 것이라는 시나리오에 주목했다. 이를 의식한 듯 정일재 LG텔레콤 사장은 12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합병 논의가 없으며, 시너지 극대화를 위해 노력을 진행하겠다는 유보적 입장을 보였다.4)
업계가 여러 시나리오를 구상하는 동안 정부는 내심 LG 통신계열이 합병해 SK텔레콤, KT에 이은 종합통신 3강의 한축이 되기를 바랐다. 방송통신위원회는 2009년 5월 12일 이러한 희망을 공식 발언했다. 3년 내 통신계열사 간 합병을 유도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도 이틀 후인 14일 공청회를 개최하고 중장기 통신정책 방향으로 LG 통신계열사 간 통합이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결론적으로 LG 통신계열 통합의 열쇠는 한전이 쥐고 있었다. 한전은 지분 매각이 정해진 절차이기는 하나 제 가격이 아니면 매각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막대한 합병 자금 부담을 털어내야 하는 LG측와 한전의 입장차는 만날 수 없는 이차선 도로 같았다.
3위 사업자이기는 하나 실적면에서 견조한 성적을 거뒀던 LG 통신 삼형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LG 통신계열사는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의 결합에 따른 유무선 통신시장 강자의 탄생, CEO 리스크로 지지부진했던 KT-KTF 합병이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 손에서 이뤄지자 하락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무선종합통신 2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규모의 경제 실현이 필요했다.
LG 그룹은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5) 2009년 10월 8일 이상철 전 정보통신부 장관을 영입해 삼형제의 합병 총괄 자리에 앉혔다. 대외적으로는 LG경제연구원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통합 KT의 수장인 이석채 회장을 견제함과 동시에 통신분야 전문가로서 LG를 비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인사로 평가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철 전 장관의 이력은 화려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PCS의 시발점인 초대 KTF 사장을 역임한 후 2001년부터 2002년까지 KT 대표로 IMT-2000 사업권을 따낸 장본인이다. 이 같은 성과를 바탕으로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외풍에도 견딜 수 있는 전문가이자 대내외적으로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강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상철 LG경제연구원 고문이 자리에 앉자 삼형제의 합병에 가속이 붙었다. LG그룹은 합병 추진을 위한 전담팀을 구성하는 한편, 10월 15일 LG텔레콤과 LG데이콤, LG파워콤의 나란히 이사회를 개최하고 2010년 1월 1일 통합법인 출범을 약속했다. 통합 LG텔레콤 수장은 자연스럽게 이상철 부회장이 낙점됐다.
가장 큰 걸림돌이던 한전 지분은 매수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LG파워콤의 1대 주주인 이상 강행돌파하겠다는 의도였다. 이후 한전과의 협의를 통해 후속조치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LG텔레콤은 이사회 결의 이튿날인 10월 16일 방송통신위원회를 찾아 합병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오후 1시 방통위에는 한양희 LG텔레콤 정책협력실장과 김성현 금융/IR팀장, 박경중 정책개발팀장이 나섰다.
업계에서는 LG데이콤이 아닌 LG텔레콤이 나선 점에 대해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합병 발표 역시 LG텔레콤이 대표로 나섰다. 통신사업경쟁력 강화 차원해서 유선뿐만 아니라 무선의 합병 역시도 진지하게 검토했다는 것. 그 결과 2개사보다는 3개 사가 시너지 효과를 내기에 더 탁월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LG 통신삼형제의 합병은 이전 SK텔레콤과 하나로텔레콤 인수전과 KT-KTF 합병보다 반대 여론이 크지 않았다. 방통위 역시 11월 18~20일까지 양평 코바코연수원에서 전문가 심사를 단행하는 듯 순조롭게 합병 심사를 이어갔다.
공정거래위원회는 12월 2일 아무런 조건 없이 합병을 수용하는 의견을 정리해 방통위에 보냈다.6) 대부분 3위 사업자였기에 통신시장에 아무런 경쟁제한성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다만, 막판 변수는 여전히 잔존했다. 경쟁사들은 또 다른 종합통신강자를 원하지 않았다. 재벌기업인 LG그룹이 거대 통신기업을 세우겠다는데 SK텔레콤과 KT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열세에 놓인 후발주자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즉, 3위 사업자에 대한 규제 보호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3위 사업자였기에 국민을 대상으로 한 요금인하 정책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방통위는 막판까지 승인 조건에 대해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논란의 중심에는 초당과금제와 접속료 차등화 폐지가 거론됐다.
접속료 차등화 폐지는 LG 통합통신사에게만 유리하게 차등화하지 않고 모두가 동등하게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SK텔레콤과 KT가 원하는 방향이었다. 실제 LG는 이 차등화를 통해 접속료 흑자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초당 과금제의 경우 SK텔레콤에게만 요구됐던 규제이기 때문에 LG뿐만 아니라 KT로도 확대될 수 있다. 초당과금제만큼은 모두가 숨죽일 수밖에 없는 규제였다.7)
방통위는 12월 10일 조건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역시나 초당과금제와 규제 보호막 해제가 원인이었다. 장고를 거듭한 끝에 약속된 14일 방통위는 조건부 인가 판단을 내렸다. 공정경쟁과 이용자 보호를 위해 최소한의 인가조건을 부여하기로 했다.8)
주요 조건으로는 농어촌 지역의 광대역통합정보통신망(BcN)을 구축하고 내외부 요금 부과 과금 방식 등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한편, 초당과금제 도입을 권고하는 수준에서 마무리했다. 점진적으로 규제 보호막 역시 거두기로 했다.
마침내 LG텔레콤을 중심으로 LG데이콤과 LG파워콤이 한 자리에 모였다. 2010년 1월 6일 공식적으로 이상철 부회장이 통합LG텔레콤의 수장으로 올라섰다.9) 서울 마포구 상암동 사옥에서 취임식을 가진 이상철 부회장은 결연한 의지를 내부 직원들에게 전했다.
이 부회장은 “통합LG텔레콤은 이제 3위 굴레를 벗어나 시장의 변화를 꿰뚫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태풍의 눈이 되고자 한다”라며, “그 변화의 주도는 탈통신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주문했다. 이어 “통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통신이라는 틀을 깨고 새로운 통신 장르를 만들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5월 13일 5차례에 걸친 사명 개발과 사내 공모 과정을 거쳐 800여 개의 다채로운 통합LG텔레콤의 사명 후보군이 도출됐다. 이 중에서 미래사업영역에 대한 표현과 통신 연관성, 비즈니스적 특성, 발음과 이해, 기억의 용이성과 독특성, 참신성 등 여러 기준을 평가해 새로운 사명으로 LGU+(유플러스)를 낙점했다.10) ‘U’는 유비쿼터스 세상을, ‘+’는 고객에게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원하든 더 나은 가치를 전달하겠다는 확장의 의미로 풀이됐다.
새 사명인 LG유플러스는 6월 29일 서울 상암동 사옥에서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최종 승인됐다.11) 이에 따라 2010년 7월 1일 LG유플러스라는 새 이름으로 첫 닻을 올렸다.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라는 통신 3강 체제의 완성이자 앞으로 벌어질 피 튀기는 난전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1) 차지완 기자, <한전 사장에 김쌍수 씨 내정>, 동아일보, 2008. 8.20.
2) 양영권 기자, <한전, LG파워콤 지분 매각키로>, 머니투데이, 2008. 8.27.
3) 김지연 기자, <박종응 사장 "데이콤-파워콤 합병 일정 미확정">. 아이뉴스24, 2008.10. 9.
4) 양효석 기자, <(일문일답)LGT사장 "데이콤·파워콤과 합병논의없다">, 이데일리, 2008.12.10.
5) 김현아 강호성 기자, <LG 통신3사 합병 가속화…이상철씨 영입>, 아이뉴스24, 2009. 10. 8.
6) 채수웅 기자, <공정위 조건 ‘無’…LG 통신3사 합병 ‘착착’>, 디지털데일리, 2009.12. 3.
7) 신혜선 기자, <'초당과금제'가 LG3콤 합병조건?>, 머니투데이, 2009.12. 9.
8) 김현아 기자, <[일문일답]LG통신 합병으로 유효경쟁정책 '폐지'>, 아이뉴스24, 2009.12.14.
9) <이상철 신임 LGT CEO, 취임일성은 ‘가치경영’과 ‘탈통신’>, 전자신문, 2010. 1. 6.
10) 강은성 기자, <"굿바이! LG텔레콤"...새이름 LG유플러스>, 아이뉴스24, 2010. 5.13.
11) 이세경 기자, <LG텔레콤, 상호 LG유플러스로 변경 승인>, 파이낸셜뉴스, 2010. 6.29.
12) 윤상호 기자, <LG유플러스, “탈통신 세계 1등 기업 된다”>, 디지털데일리, 2010.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