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알레포를 마음에 새기며.
1.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그분'을 향한 촛불집회는 계속되었다. 주말 없는 삶이 지속되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길라)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언제나처럼 구호를 외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던 도중, 조금 다른 풍경과 눈이 마주쳤다.
광장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집회는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공간이란 명제가 조금씩 자리 잡고 있는 광화문광장이지만 그것은 어딘가 어색하고 엄숙하고 불편하며 숙연해지는 풍경이었다. 알레포라니. 당장 눈 앞의 청와대 앞에도 진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알레포라니. 그렇게 먹먹한 생각이 들면서도 이내 되뇐다. 알레포. 시리아.
2.
알레포. 시리아의 수도는 아니지만,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레반트 지역 교역의 중심지'였'다. 기독교인들에게 '안디옥'으로 잘 알려진 터키 남부 도시 하타이에서 차로 3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터키에서 이집트로 육로 여행을 계획한 여행자라면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수차로 유명한 하마를 거쳐 팔미라로 넘어가거나, 크락 데 슈발리에라는 십자군의 성채를 보러 홈즈를 거쳐 다마스쿠스로 가는 루트는 저렴하면서도 빼어난 문화재들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다운 여행루트'였'다. 알레포 역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기에 구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기도 하며 단단한 알레포 성채와 웅장한 우마야드 사원 등, 볼거리도 충분한 매력적인 곳이'었'다.
3.
2008년 여름 알레포의 우마야드 사원에서 만난 아이가 생각났다. 우마야드 사원의 상징이었던 탑을 찍고 있었는데 아랫 편으로 살짝 웃음 짓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비네팅이 심한 카메라를 쓰고 있었으니, 사진엔 나오지 않았겠거니 했는데, 희미하게나마 사진에도 들어와 있었다.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으레 눈인사 정도에서 인연이 끝나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사진을 찍고 나서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친구에게 자기 아들을 떠넘긴 아저씨의 바람과 달리 아이는 펑펑 울었고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보다시피 결과가 이모양이었다.
민소매, 반바지 불가. 신발은 벗고 다녀야 될 것. 이 규정을 따라 친구는 옷을 한 벌 빌렸고, 신발은 각자 들고 다녔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곤혹스러웠던 차, 그 아이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손으론 한 무더기의 신발을 가리키며.
근데 이 아이, 신발을 지켜볼 생각은 안 하고 우릴 여기저기 끌고 다닌다. 더러는 사진을 함께 찍어달라는 시늉을 하며. 그래서 우린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사진을 찍히고, 사진을 찍었다. "살람 알라잇쿰"과 "슈크란"을 입에 달고서.
4.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10여 년이 지났으니 어엿한 청년이 되었을 텐데. 정부군이었을지, 알레포 시민군이었을지, 누군가의 아빠였을지. 혹은 다에시에 경도되었을지. 아니면 난민선에 몸을 실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탈출했을지. 혹은 이 사진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일지.
혹자들은 레반트 지역의 식량난에서부터 시작된 사회불안을, ISIS의 준동을, 아사드 대통령과 알라위파의 생존게임을, 미국과 러시아의 파워게임을, 난민 소년의 죽음을, 난민의 증가와 사회불안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어느 것 하나만으로 온전히 내전을 읽을 순 없지만, 광화문 광장의 그 촛불에서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린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Witness you & Aleppo.
늘 그렇듯, 스크롤 or 손가락을 천천히 내린 바로 당신이 지금 내게 가장 고마운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