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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pr 15. 2019

건축가가 되었다면 행복했을까?

어릴 때 꿈은 화가였다. 딱 초등학교 1학년까지였다. 2학년이 되고 어느 날, 내 꿈은 건축사로 바뀌었다. 숙제 대신 노트에 낙서만 하던 나를 본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건축을 해 봐. 네가 좋아하는 그림도 그릴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어.’  건축사가 의사나 변호사처럼 돈을 많이 벌던 시기였다. 건설 붐이었고, 아버지가 건축사사무소를 하는 친구는 매년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들은 이후 내 장래희망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건축사. 부연 설명을 하자면, 건축사와 건축가는 좀 다른 용어인데, (‘사’는 의사나 변호사와 같이 면허 또는 자격을 의미하고, ‘가’는 작가나 예술가 같이 예술이나 창작에 의미를 둔 말이다) 아무튼 건축사인지 건축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건축과에 진학하는 게 내게 하나 있는 장래 희망이었다.


유명한 건축 작품 같은 건 본 적도 없고 (건축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 주변에는 멋대가리 없는 3층 연립주택이나 뾰족한 지붕의 교회 건물밖에 없는 소도시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건축과에서는 대체 무엇을 배우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서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고, 그곳이 건축과면 되었다.


내가 대입을 준비할 때까지도 건축과의 인기는 좋은 편이었다. 좋은 편이었다고 한 건 나름 겸손한 표현이고, 사실 건축과에 다닌다고 하면 왠지 더 있어 보인다고 할까, 더 세련되었다고 느껴졌다. 그러니까, 기계공학과나 전기과에 다닌다고 하는 것보다는 그랬다는 말이다. (관련 전공자 여러분 사과드립니다. 쿨럭)


대학에 들어가자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그 유명한 ‘겨울연가’를 비롯해 ‘시월애’, ‘내 머릿속의 지우개’  등,  건축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게 그 당시 유행이었나 싶기도 하다. 이정재, 전지현, 정우성, 손예진 등 지금 들어도 쟁쟁한 스타들이 주연을 맡았다.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은 아니지만, 그 당시 우리 과 동기들 사이에 유행했던 게 있다. 바로 화통이다. 보통 미대생들이 작품이 구겨지지 않도록 종이를 돌돌 말아서 넣고 다니는 동그랗고 길쭉한 플라스틱 통 말이다. 한 명 두 명 그 안에 선 그리기 연습을 하는 켄트지나 필통 같은 걸 넣고 다니기 시작하더니, 50명 남짓했던  동기생 모두가 화통을 맸다. 나도 외출할 때 가방은 안 챙겨도 화통은 꼭 들고 나왔다.

 

스케일은 건축가의 상징이었다.

그때까지였다. 들뜬 마음으로 학교에 다녔던 건. 거실과 방은 남쪽에, 화장실과 주방은 북쪽에 배치하는 게 건축설계라고 생각했던 내게 디자인이니 컨셉이니 하는 용어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동기들 중에는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친구도 있었다. 나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감각도 없는 친구도 물론 있었지만, 나만 빼고는 다들 눈치껏 따라가는 듯했다.  


군대에 갔다 오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맘 때 많은 남자 신입생들이 그러하듯, 군대가 모든 불성실함의 면죄부를 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 2년을 술과 담배의 양을 늘리는 일로 보냈다. 내 반지하 자취방에는 빈 소주병과 재떨이로 쓰는 동그란 프링글스 감자칩 통이 청춘의 상징인 양 굴러다녔다. 막상 졸업할 때가 되니, 이도 저도 아닌 학창 생활을 한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유명한 건축설계 회사에서는 내 가벼운 포트폴리오 따위를 볼 리도 없었고, 야근과 박봉이 보장된다는 작은 사무소에 갈 만큼 열정이 있지도 않았다. 대학에 가는 것처럼 시험을 봐서 입사할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고 졸업 후 1년 더 학교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생각했던 회사에는 가지 못하였지만, 가까스로 취업은 할 수 있었다.


그 회사에 올 해로 12년째 출근 중이다. 건축과 관련된 일이기는 하나 건축사든 건축가든 더 이상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회사에는 내가 참 멋없다고 생각했던 기계과니 전기과 출신이 가득하다. 충분히 의미 있는 직업이고, 열심히 해 볼 만한 일이다. 지금 보니 그렇다는 얘기다. 처음에는 멋대가리 없는 공대 출신 아저씨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로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올해까지만, 내년까지 만이라 생각하며 버티듯 일했다. 이번에는 면죄부를 줄 군대도 없었는데 그랬다. 이 일은 내가 하고 싶던 일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며 출근했고, 퇴근을 해서는 회사에 매여있는 게 억울하다며 아내를 괴롭혔다. 철없는 남편이었다. 계속해서 다른 곳을 기웃거렸지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용기도 없어 다시 아침이 되면 꾸역꾸역 마을버스를 타고 전철을 갈아타며 출근을 했다.


왠지 멋있어 보이는 일, 왠지 보람 있을 것 같은 일, 아니면 왠지 편할 것 같은 일, 아니, 사실은 그냥 지금 하는 일만 아니면 뭐든 해보고 싶었지만, 나란 인간은 함부로 새로운 일에 도전할 인물이 못된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이제는 흔히 말하는 ‘빼박’이다. 12년간 한 분야에서 일한 사람을, 다른 분야에서 어서 옵쇼 하며 받아줄 리도 만무하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얼마 안 돼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었다. 은행에 대출을 알아보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육십이 되어 퇴직금을 받기 전에 상환하는 것은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아무리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나이는 관계없다고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과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기 위한 대출금을 무시할 수는 없다.

 

같은 일을 10년 넘게 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부끄럽다. 작지만 패기 있는 회사에서 박봉과 철야근무를 견뎠으면 건축가가 되었을까?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면? 세계 여행을 했다면 삶의 의미를 발견했을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사실 그렇게 중요한 질문도 아니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왠지 쿨해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는 게 훨씬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멋있어지는 길이다. 꼰대 같은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같이 실행력은 없으면서 고민만 많은 타입에게는 어떤 아름다운 말보다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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