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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pr 09. 2019

청승맞거나 듬직하거나

청승맞은 걸 좋아한다. 

이소라의 노래는 대부분 청승맞다. ‘청혼’의 히트 이후 청승맞은 노래만 부르기로 작정했나 싶을 정도이다. 가장 좋아하는 가수다. 몇 년 전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바람이 분다’를 부르는 모습은 일부러 보지 않았다. 나만 알던 청승을 다른 사람이 알게 되는 게 싫었다. 고등학교 때는 청소 시간에 빠져나와 운동장 스탠드에 홀로 앉아 있었다. 청소가 하기 싫어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청승을 떨기 위해서였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왜 태어났을까’ 따위의 고민을 했다. 대학에 가자 본격적으로 청승을 떨 수 있었다. 고등학생은 미팅뿐 아니라 청승을 떠는 일도 수능 이후로 미뤄야 한다. 밤마다 자취방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담배가 좋은 건 내뿜는 연기에 내 한숨이 보이니까요.’ 심야 라디오에서 유희열이 한 말을 내 말인 양 하고 다녔다. 담배를 배운건 내 청승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남들은 상관하지 않았겠지만 괜히 쓸쓸한 척했다. 유희열을 듣고, 가사는 알아듣지 못해도 라디오헤드를 들었다. No surprises. 길쭉한 프링글스 통에 꽁초를 채워 넣으며, 그리움을 채우고 있다 생각했다. 지금은 쓴 맛 때문에 잘 마시지 않는 소주를 마시며, 이제 나도 인생의 씁쓸함을 배워간다 생각하며 그만큼의 담배를 함께 태웠다.


군대에서 보초근무를 나갈 때는 주머니에 수첩을 꼭 챙겨 나갔다. 내 근무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생각했다.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일기를 썼다. 일기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짤막한 글들이었다. 나름 감성을 뿜어낸다 자평하며 제대 후에도 몇 년간 보관했다. 여러 번 이사를 거치며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결국 버려졌지만. 제대 후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다. 짐을 줄이기 위해 책은 한권만 가져갔다. 조병준 시인의 ‘길에서 만나다’. 책 속의 시인처럼 나도 여행을 하면 뭔가 그럴듯한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3개월은 농장에서 일했다. 숙소는 내 또래 한국 사람이 몰려 사는 카라반이었다. 어떤 형을 만났다. 평소 친구도 잘 사귀지 못하고, 형은 더욱 어려워하는 내게 행운 같은 만남이었다. 듬직해 보이지만 나보다 더 청승맞은 사람이었다. 함께 내 CD플레이어 속 이소라를 들었다. 변변한 스피커도 없어 그 형의 작은 헤드폰으로 볼륨을 최대로 해서 함께 들었다. 종종 헷갈리는 가사를 놓고 이게 맞네 저게 맞네 실랑이도 했다. 나는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고 하고, 국문과를 다니던 그 형은 ‘추억은 달에게 적힌다’라고 했다. 인터넷 접속도 어려웠고, 가사집 같은 것도 있을 리 없어 누가 맞았는지는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되었다.

이런 곳에서 들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크게 변한 건 없었다. 돌아와 보니 내가 없는 사이 친구들은 루시드폴을 듣고 있었다. 볕 좋은 날, 이별을 고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지금 복원이 한창인 창경궁과 종묘 사이의 도로 위였던 것 같다. 청승이었다. 내가 먼저 지쳐서, 이미 반쯤은 헤어진 상태였는데도 그랬다. 눈물을 몰래 훔치며 루시드폴의 노래를 들었다. 그건 사랑이었지. 담배는 호주 생활을 마칠 무렵 돈을 아끼기 위해서 끊었다. 졸업할 때 즈음부터 자판기 커피가 아닌 원두커피의 맛을 알기 시작했다. 담배의 자리를 커피가 대신했다. 카페인에 민감한 체질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각성효과보다는 왠지 더 몽롱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마셨다. 담배 연기 대신 내 한숨 같은 마음을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얼핏 청승과는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듬직한 남자를 좋아한다. 모든 일에 흐리멍덩하고 자도 자도 피곤한 사람이 아닌, 좋은 기운을 뿜으며 여자 친구나 아내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런 남자. 20년쯤 후, 내 딸에게 소개받는 남자 친구가 그런 녀석이면 좋겠다. 배우로 치면 하정우? 유희열도 좋지만 역시 하정우 같은 남자가 듬직하다. 영화 ‘본’ 시리즈의 맷 데이먼도 듬직하기로 치면 둘째 가지 않는다. 주드 로 같은 섹시함은 없지만, 우직하고 신뢰가 가는 타입이다. JTBC에서 손석희와 하는 인터뷰를 보고 더 좋아졌다. 노타이에 평범한 차콜색 정장 차림이었다. 결혼할 때 마지막으로 맞춘 내 옷장 속의 재킷과 비슷하다. 아니 오히려 품이 더 넉넉했다. 주드 로였다면 좀 더 몸에 딱 붙는 슈트를 입고 나왔을 것이다. 핑크색 셔츠를 입었을지도 모르겠다. 맷 데이먼이 듬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청승맞기도 하다. 화려하지 않은 외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데뷔작 ‘굿 윌 헌팅’에서 그는 천재지만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 역시 육체와 두뇌 모두 섹시하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맨다. 007의 제임스 본드와는 다르다. 항상 자신만만하고 여자들에게 능청스럽다. 다니엘 크레이그부터는 조금 변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바람둥이에 화려한 언변을 자랑한다. 재미있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듬직과는 거리가 멀다.


목련을 좋아한다. 이 말을 위해 돌아왔다. 매년 봄이 되면 벚꽃이 좋은지 목련이 좋은지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벚꽃과 목련. 이미 분위기는 벚꽃의 한판승이다. 목련을 일부러 보러 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도 나는 매년 목련 편이다. 나도 부러 보러 가는 일은 드물다. 간혹 길가에, 공원에, 그리고 사진 속 대릉원에 서 있는 목련을 바라본다. 어렸을 적 친구 집 마당에 서 있던 목련나무가 부러웠던 걸까? 만화 ‘바람의 검심’에서 목련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유난히 쓸쓸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담했던 대학 교정의 잔디밭에 홀로 있던 홍목련 나무가 애써 마음에 쓰였는지도. 그 커다랗고 탐스럽고 든든한 꽃 잎.  


4월이다. 목련의 듬직했던 꽃잎이 툭하고 떨어진다. 무심하게, 그리고 청승맞게. 그 커다란 꽃잎이 눈물처럼 뚝 떨어지는 순간을 보면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간다. 운동장 스탠드에 혼자 앉아있던 나, 손을 호호 불며 수첩을 꺼내던 나, 버스 안에서 눈물을 훔치던 나.

  

문득 카라반에서 이소라를 같이 듣던 그 형이 생각난다.


형,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가 맞더라.



목련이 지네
멍들어 지네
누구에게도 이기려 하지 않고 지네
- 목련, 윤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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