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드라마 ‘도깨비’의 열풍 이후, 남자들 사이에서는 도깨비 아니, 공유의 헤어스타일, 일명 가르마 펌이 아직까지 유행이다. (나도 2년째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다.) 나를 비롯한 일반 대중들이 연예인의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다른 유명 연예인들까지 모두 따라 하는 것은 조금 의아하다. 그들은 개인 스타일리스트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 스타일도 충분히 소화할 외모가 아닌가.
한 사람의 헤어스타일은 그 사람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보통 남자보다 여자들이 헤어스타일에 더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우선 남자들은 대개 한두 달에 한 번씩 미용실(간혹 이발소)에 간다. 몇 개월에 한 번, 길게는 연중행사로 미용실에 가는 여자(예를 들면 우리 아내)에 비하면 자주 머리를 다듬어야 한다. 많은 남자들, 특히 중년 이상의 남자들이 머리 모양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기는 하지만, 그 또한 그 사람의 캐릭터이거나 삶의 일부다. 크게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하루하루가 바빠, 혹은 아침잠이 많아 머리에 신경을 쓸 틈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게 왠지 낯설고 쑥스러운 사람일 수 있다.
패피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소심하기까지 한 나 역시 소소하게 머리 스타일을 바꿔왔다. 시작은 중2 때였다. 중2병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중2는 그때나 지금이나 제일 위태로운 시기다. ‘교실 이데아’를 따라 부르면서도 정작 교실 맨 앞자리에 얌전히 앉아있던 내게 삭발은 유일한 반항이었다. 소심한 반항. 그것도 사실은 그 당시 몇몇 아이들 사이에서 시작된 유행을 따라한 것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에는 왠지 모든 걸 포기하고 사는 기분이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를,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음으로 표현했다고 할까. 세상을 향한, 기성세대를 향한 소심한 복수였다. 고3이 되어 졸업사진을 찍을 때는 일부러 책상에 엎어져 자다가 눌린 머리를 한 채 카메라를 노려 봤다.
대학에 가서는 과에서 제일 잘생긴 형을 따라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했고,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 머리를 해보기도 했다(너무 어울리지 않아 금방 잘라버렸지만). 자유가 분에 넘치던 때였다. 결혼하고 얼마 동안 회사생활과 가정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루지 못한 꿈, 바라던 삶(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을 모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앞머리를 짧고 못생기게 잘랐다. 드라마 ‘도깨비’가 시작할 때쯤 비로소 가장과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나도 공유 머리나 해볼까?’하고 몇 개월 동안 머리를 길러 머리를 말은 것이다.
‘헬로톡’이라는 언어교환 어플이 있다. SNS와 비슷한데 사용자들의 기본적인 활동 목적은 언어 교환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미국인은 한국인 친구를 사귀고, 일본어를 배우고 싶은 이탈리아 사람은 일본인과 친구를 맺는다. 이 앱에서, 어떤 외국인이 ‘한국 남자는 왜 모두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니죠?’라고 물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남자들이 학생, 직장인 할 것 없이 비슷한 스타일이다. 샤기 컷이라는 일본 만화에 나올 것 같은 스타일이 유행하더니, 투 블록이라는 옆머리만 바리캉으로 하얗게 만드는 스타일이 유행이다. 중고등 학생들 사이에서는 귀두컷이라는 바가지 머리 같은 게 유행이고, 그보다 나이가 많은 층에서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반곱슬 머리. 지드래곤이 아무리 패션 아이콘이라고 해도 그의 머리를 따라 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헤어스타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일한 자기표현 수단이다. 팔에 문신이 있으면 직장에서 와이셔츠 소매도 걷지 못하고, 수염이라도 기르면 상사들에게 수염 멋지네와 같은 잔소리(깎으라는 소리니까)를 감수해야 한다. 남자의 경우 귀걸이를 하고 출근하는 사람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교복처럼 회사복이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옷이나 신발 스타일도 참 비슷비슷하다. 많은 회사에서 노타이를 비롯해 좀 더 편안한 차림을 권하자 백화점에서는 ‘비즈니스 캐주얼’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모든 매장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재킷과 바지를 팔고, 최근 아저씨들 사이에서는 양복바지에 검정색 나이키 운동화를 매치하는 게 대유행인 듯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머리 스타일은 그나마 변화를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주말에 일단 미용실에 가서 눈 딱 감고 ‘이 스타일로 해주세요’ 하면 된다. 한 번 깎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머리는 어차피 다시 긴다.
사실 보수적인 회사에서는 평범한 파마머리조차 쉽지 않다. 다들 이발소에는 가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단정한 스타일이라면 차라리 40년 경력의 이발사 솜씨가 더 좋을 것 같다. 나보다 세 살 밖에 많지 않은 한 과장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올백을 하고 다닌다. 아침마다 젤을 한 통씩 쓰는 듯하다. (왁스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역시 부장님들과 말이 잘 통한다. 승진도 빠르겠지? 나처럼 머리를 기르고 복도에서 마주친 상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할 때마다 머리를 다시 쓸어 올리는 인간은 아무래도 승진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 성공 지향, 외모에 대한 관심, 아침잠과 게으름, 만성피로, 유행의 민감도, 생활의 만족도, 반항적 기질, 직업의 성격.
다 비슷해 보이는 헤어 스타일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