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번째 카세트는 마이마이였다. 2000년 이후에 태어난(90년 이후인가?) 분들은 카세트니 마이마이니 당최 무슨 말이야 할지도 모르겠다. 서태지와 아이들을 들으며 중학생이 된 내가 제일 가지고 싶었던 건 미니 카세트 플레이어였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 살던 나는 소니의 워크맨 같은 건 들어보지도 못했고, 들어 봤더라도 어떤 경로로 사야 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하교 길에 삼성전자 대리점 앞에 쌓여있는 카탈로그를 가져와 내가 가지고 싶은 마이마이 모델을 매일 같이 바라보았다. 제일 비싼 모델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가지고 싶은 건 상당히 상위 모델이었다. 제일 가지고 싶은 마이마이 사진에 볼펜으로 빙글빙글 돌려 동그라미를 쳐뒀다. 그래도 아무래도 비싼 것 같아, 좀 더 저렴한 모델 중에서도 하나 골라 두었다. 부피가 좀 더 크고 오토리버스(테이프 한 면의 재생이 끝나면 자동으로 반대면이 재생되는 기능, 아… 정말 이런 것도 설명해야 하나요…) 기능이 없었다. 아버지였나 어머니였나, 어렵게 얘기를 꺼내 내 첫 번째 미니카세트를 손에 넣었다. 오토리버스 기능은 없었다.
운동도 잘 못하고 범생이었던 내게 마이마이의 이어폰은 해방구와 같았다. 누군가 복제를 해 준 테이프를 다 늘어날 때까지 들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1집과 2집이 마구 섞여있는 테이프이었다. 봄 소풍에 가서도 친구들과 조잘대는 대신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물었다. ‘넌 친구보다 음악이 좋냐.’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친구였다. 그런 친구마저 없었다면 훨씬 더 고립되었을 것이다.
새로 지은 아파트에 이사를 가며 아버지가 장만한 인켈 오디오에는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2개 달려 있었다. 이는 테이프 복제가 가능하다는 걸 의미했다. 테이프를 사달라고 하면 왠지 공부나 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 친구 테이프를 빌려 주말마다 복사를 했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을 해가며, 나만의 테이프를 만들었다. 가끔씩 디제이디오씨(DJ.DOC)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새 앨범을 사면, 친구들은 ‘정말 좋아하나 보다’라고 했다. ‘너 원래 테이프 잘 안 사잖아’가 생략된 말이다. 그런 복제 테이프가 몇십 개쯤 만들어졌을 때 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에 가니 용돈이 조금 더 넉넉해졌다. 테이프를 복사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가지고 있던 마이마이도 왠지 창피해졌다. 친구들은 소니 워크맨을 들고 다녔다. 용돈을 모았다. 군산이 집인 친구가 군산에서 워크맨을 파는 곳을 안다고 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군산, 전주 등 전라북도 각지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살던 곳에서도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파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모아둔 만 원짜리 십여 장을 들고 그 친구와 군산에 갔다. 부모님 없이 다른 지방에 간 건 처음이었다. 밀수된 물거을 파는 듯한 전파상에 들어가 가장 작은 크기의 워크맨을 샀다.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른 경험이었다. 부모님과 운동화를 사러 가면 나이키는 비싼 것 같아 항상 다른 가게로 발길을 돌리던 나였다.
주변에는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이 넘쳤다. 주변에서는 메탈리카나 RATMRage Against The Machine 같은 메탈 음악을 많이 들었다. 나는 펑크를 들었다. 그린데이Green day와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 그린데이와 라이벌 격이었던 오프스프링Off spring이 더 인기가 많았지만 나는 오직 그린데이였다. 전자음악도 들었다. 지금이야 EDM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지만, 그때 전자음악은 주류가 아니었다.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와 프로디지The Prodigy를 좋아했다. 지금도 왕성히 활동하는 케미컬 브라더스와 그린데이를 보면 스스로 뿌듯하다. ‘역시 그때부터 힙했던 안목이야.’
군산의 그 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을 통틀어 음악을 가장 많이 듣고 많이 안다. 그 친구를 따라 노브레인과 말 달리자를 들으며 ‘대학에 가면 꼭 홍대 앞에서 만나자’와 같은 약속을 했다. 수능을 보고 생전 처음 가본 콘서트도 그 친구 덕이었다. 윤도현이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전북대에서 그 공연을 보고 나도 윤도현의 팬이 되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니 테이프를 듣고 있는 건 나 밖에 없었다. CD플레이어가 필요했다. 요즘이야 신도림 테크노마트가 유명하지만 그때 수입 전자제품을 싸게 사기 위해서는 용산 전자상가에 가야 했다. 용팔이라 불리는 호객꾼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든든한 친구가 필요했다. 군산 그 친구는 전주에서 재수 학원을 다니는 중이었기 때문에 같이 갈 수 없었다. 이번에는 고1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데려갔다. 역시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였다. 자미로콰이Jamiroquai의 이름을 딴 이메일 아이디를 쓰는 친구다. 이번에는 제일 얇은 물건 대신 두껍고 투박한 놈을 골랐다. 무슨 바람이었는지 투박한 게 멋스럽지라고 생각했다. 두고두고 얇고 쌔끈한(쌔끈하다고? 이런 말을 아직 쓰나?) 물건을 사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래도 그 씨디피와 오랜 시간 함께 했다. 언제나 매고 다니던 빨간 백팩의 보조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더 쌔끈한 MP3 플레이어라는 물건이 급속도로 퍼졌지만 꿋꿋했다. MP3 플레이어를 살 바에야 CD 10장을 더 사겠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호주에 갈 때도 그 CD플레이어를 들고 갔다. 짐을 줄이려면 목에 거는 (쌔끈한) MP3를 하나 살 법도 했는데 그랬다. 함께 용산에 갔던 그 친구는 나에 관한 글을 한번 써보고 싶다고 했다. ‘어떤 글?’이라고 되묻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완고하지는 않지만 최신 기기나 유행을 최대한 늦게 받아들이는 인간’ 정도의 주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CD플레이어 말고도 미니 컴포넌트라고 불리는 작은 오디오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얼결에 얻은 물건이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아무런 선물도 바라지 않는 내가 답답했던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아들이 오디오 하나 사달래’라고 해서 받았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유일하게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물건이었다. 그 작은 스피커로 밤마다 유희열의 음악도시를 들었다. 듣는 음악도 바뀌었다. 대학에 오니 세련된 서울 아이들은 토이나 전람회같이 부드러운 음악을 듣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런 음악을 듣는 부류는 모두 앞자리에 앉아 있거나, 주말에 교회를 꼬박꼬박 나가던 친구들이었다. 뒤늦게 토이를 들었다. 토이의 가사를 외우며 사랑을 하고 또 헤어졌다.
MP3플레이어는 대학을 졸업할 때쯤 샀다. 아마 2006년이나 2007년이었을 것이다. 취업하고 만난 지금의 아내는 그 흔한 MP3도 없던 사람이었다. 내 것과 같은 모델을 하나 사서 에피톤 프로젝트나 루시드폴 같은 음악을 채워서 선물했다. 몇 년 뒤 아이폰4(3는 역시 건너뛰었다)를 사면서 MP3 플레이어는 서랍 속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애플의 아이튠즈는 신세계였다. 퇴근 후 한 달 가까이 노트북에 저장된 MP3 파일을 아이튠즈의 형식에 맞게 정리했다. 앨범커버도 검색해서 끼워 넣었다. 늦바람이 불어 좋아하게 된 빅뱅의 앨범도 있었다. 아이폰의 세대가 올라갈수록 음악을 듣는 방식도 바뀌었다. MP3 파일을 다운로드하는 대신 멜론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었다. 스트리밍 사이트 또한 남들보다 훨씬 뒤늦게 가입했다. 대신 MP3 파일을 사서 저장했다. CD까지는 못 사더라도 내 하드디스크에 파일이라도 저장해야 내 음악 같았다.
아이폰을 몇 차례 바꾸면서 슬슬 MP3 파일을 옮기는 일도 지겨워졌다. 결국 스트리밍 서비스 정액제에 가입했다. 그런데 아무리 새로운 음악을 들어도 브로콜리 너마저의 보편적인 노래와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보다 좋아하게 되는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1년 약정을 해버린 스트리밍 서비스 대신 내 아이폰에 저장된 그 두 앨범만 반복해서 들었다. 테이프였다면 다 늘어나서 못 듣게 되었을 만큼.
마이마이, 워크맨, C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 아이폰. 항상 두 세 걸음 느리게 새로운 음향기기를 손에 넣었다. 스마트폰 이후로는 아직 더 새로운 형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블루투스 이어폰을 쓰는 사람이 최근 부쩍 늘었다. 용산에 함께 갔던 친구 결혼식의 사회를 봤는데, 답례로 에어팟을 사준다는 걸, ‘내가 최저가 검색해서 나중에 살게’하며 상품권으로 받았다. 에어팟이라니. 아직 내게는 너무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