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서 제일 고학년이 되던 해, 남자 애들 사이에서는 우표 수집이 유행했다. 너도 나도 똑같이 생긴 우표 수집책을 끼고 다니며, 우표를 사고팔고 교환하느라 바빴다.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은, 성인이었다면 뭉치기 힘든 조합이었다. 키 작고 깡마르고 안경을 쓴 소심한 나와, 나보다 키가 더 작고 눈까지 작아 보이는 안경을 써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녀석, 그리고 눈빛부터 악과 깡으로 가득 차 싸움을 자주 하던 녀석, 그리고 금붕어가 사는 연못이 딸린 집에 살던 나이키를 신던 녀석까지. 그때까지도 로봇이 그려져 있고 야광이 되는 운동화를 신던 나는, 나이키 운동화를 자랑하던 그 친구가 대체 무엇을 자랑하는지 조차 몰랐다. 악과 깡으로 뭉쳤던 녀석과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영영 다시 보지 못했고, 나보다 작던 그 친구와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몇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나이키를 자랑하던 녀석은 고등학교 때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우연히 마주쳤는데, 굉장히 어색한 한 번의 인사 말로 지나쳐버렸다.
그러한 친구들과 동네 연립주택들의 우편함을 뒤지는 게 하루 일과였다. 특이한 우표를 발견하면 떼어내서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혹시라도 상할세라 조심조심 떼야한다. 우편물 주인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었겠지만, 어차피 버려질 우표라 생각하고 큰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래도 경비 아저씨에게 들킬세라 조마조마했던 기억이다. 지금처럼 초등학생의 일정이 빡빡하지 않았고, 조금 늦어도 부모들은 그저 친구들이랑 놀다 왔나 보다 하던 때였다.
또, 걸어서 1시간쯤 걸리는 우표상에도 종종 들렀다. 초등학생 주머니 사정으로 그런 곳에서 오래된 우표를 사는 건 쉽지 않았다. 부모님께 감히 우표를 사야 하니 돈 좀 주세요라고는 못했다. 그래도 용돈을 모아 가끔 박정희 대통령 취임 기념, 카터 대통령 방한 기념 따위의 우표를 사 모을 수 있었다. 물론 내 수집책에는 남의 우편함을 뒤져서 우편물을 훼손하며 수집한, 우체국 직인이 찍혀 있는 우표가 대부분이긴 했지만.
특히 박정희 대통령 추모 특별 우표를 좋아했다. 추모 우표이니 만큼 화려한 색감이 아니라 모노톤으로 디자인되어 왠지 세련되게 느껴졌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꼭 그분 팬 같네요.) 그 우표가 지금 고향 집 한쪽에 처박혀 있는 우표책에 있는지 없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난생처음 어떤 무리에 끼어 집에도 놀러 가고 하교 후에도 항상 함께 하며, 나도 왠지 잘 나간다는, 요즘 말로 인싸가 된 기분이 들었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아니 열세 살 인생 동안 나는 별다른 단짝 친구 하나 없이 학교, 집만 왔다 갔다 하던 아이였던 것이다 (아, 중간에 죽도록 가기 싫던 피아노 학원도). 초등학교가 내게 준 마지막 선물 같은 시절이었다.
아쉬운 건, 우표 수집의 열풍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모두가 우표 수집에 열심이었던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제 와서 우표 수집을 했던 추억은 그다지 화젯거리가 되지 못한다. 간혹 화제에 올라도, 그렇게 흥미진진할 것도 오랫동안 얘기할 것도 없다. 대부분 초등학교의 추억은 100원짜리 하나로 스트리트 파이터 끝판을 깬 것이나, 친구들과 야구를 하다가 타자의 배트에 맞아서 병원에 간 이야기, 축구를 하다가 태클을 걸어 동네 형에게 얻어맞은 이야기 따위다. 그때 인싸가 아니었던 나는 그들과 공유할 추억이 없어 여전히 대화를 겉돈다. 내 하나뿐인 인싸의 시절은 우표 수집의 열기가 수그러들고, 함께 우편함을 뒤지던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그대로 저물었다. 그 이후로는 이렇다 할 취미도, 언제나 함께하는 친구 무리도 특별히 만들지 못했다.
인싸라는게 핵인싸템 몇 개 산다고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