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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pr 10. 2019

밀크커피와 에스프레소

대학 시절, 누가 봐도 건축과 교수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 이제는 은퇴하신 회색의 장발머리 교수님이 계셨다. 항상 재킷 겉 주머니 속이 불룩하게 소형 카메라를 넣고 다니셨는데, 연세도 지긋하시고 카리스마도 강해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크리틱(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정기적으로 행하는 교수님의 과제 비평)을 할 때마다 쩔쩔매던 분이었다. 그래도 멋쟁이 건축과 교수님답게 피자나 햄버거 같은 음식을 좋아하셔서, 크리틱이 길어지면 가끔씩 학생들에게 도미노 피자를 주문해 주시곤 하였다(도미노라고 콕 집어 말씀하셨던 것 같다). 교수님은 이런 것도 좋아하시네요 하니 문득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맛있잖아, 간편하고’라고 짧게 대꾸하신 기억이 난다. 결벽증이 있으셨는지 맥도널드에서 주문한 감자튀김을 드실 때, 손가락으로 잡은 끝 부분은 끊어내어 먹지 않고 한쪽에 모아 놓는 걸 보며 후배들과 킥킥대기도 했다. 


2004년 여름,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그 교수님을 세종문화회관 옆 스타벅스에서 만난 적이 있다. 2층에 자리를 잡고 교수님이 본인 신용카드를 주시며 에스프레소 주문을 부탁하셨다. 내가 카페라테를 시켰는지 오렌지 주스 같은 걸 시켰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에스프레소만은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그때 그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주문한 음료가 담긴 쟁반을 건네받고 ‘저기, 에스프레소가 안 나왔는데요’라고 말하는 순간, 쟁반 위에 있는 소주잔 같아 보이는 저 작은 잔의 시커먼 액체가 에스프레소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교내 자판기에 친구랑 가서 한 사람은 커피, 한 사람은 우유를 뽑아 섞어 마시는 게 그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커피였다. 간혹 세련돼 보이고 싶을 때 프림이 없는 ‘설탕 커피’를 눌렀는데, ‘그건 무슨 맛이냐’라고 묻는 친구들에게 ‘그냥 깔끔해’라며 도시적 감성을 뿜어 내기도 했다. 간혹 커피숍에 가면 무얼 마셔야 할지 몰라 메뉴판을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이제 한글을 배우는 아이가 책에서 아는 글씨를 발견한 것 마냥, ‘카푸치노’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자신 있게 주문하기도 했다.


졸업을 할 즈음, ‘던킨 커피가 괜찮다더라, 어디에 스타벅스가 새로 생겼다더라’ 정도의 말들을 주고받기 시작하며 아메리카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마침 던킨 도너츠에 들르게 돼 도넛 한 개와 커피 한잔을 주문하여 함께 먹어봤다. 눈이 번쩍 띄으는 맛이었다. 달콤한 도넛과 씁쓸한 커피의 조화라니, 이걸 먹지 못하고 지나온 청춘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신입생 때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 동창들(=하나같이 촌놈들)과 홍대 정문 앞의 던킨 도너츠에 간 적이 있다. 너무 달아 두 개 이상은 못 먹을 도넛과, 그만큼 달달한 핫초코 따위의 음료를 잔뜩 주문해, 먹고 먹다가 결국 반절 이상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나에게 돌아가 ‘핫초코 말고 커피를 주문해’라고 말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도넛도 하나만 담고... 하나만 산다고 창피한 거 아니야…)

도저히 못 먹겠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어느 날, 지금의 아내가 바르셀로나행 티켓을 저렴하게 구해, 스페인 음식 관련 책을 찾아보면서 에스프레소 꼼빠냐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아니, 씁쓸한 에스프레소 위에 달콤한 휘핑크림이 얹혀 있다니, 던킨에서 도넛과 아메리카노를 처음으로 함께 맛보던 감동을 다시 느껴볼 수 있겠는걸!’ 바르셀로나의 어느 주택가에 머무르며 매일 아침 숙소 앞 일리illy 카페에 ‘올라Hola’ 하고 들어가 에스프레소 꼼빠냐를 주문하면서 나도 이제 진정한 멋을 즐길 줄 아는 에스콰이어(맞다, 그 남성잡지)형 남자가 되어감을 느꼈다.

  

내 아내는 지금도 가끔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꼼빠냐를 보면, 마치 나를 위한 커피인 듯 반가워하고, 그러면 나는 뼛속까지 도시남과 사는 내 아내는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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