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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pr 20. 2019

패피는 아무나 하나



고등학생 시절, 즐겨보던 패션지 에스콰이어에 나오는 서양 멋쟁이들은 항상 바지 아래로 발목이 드러나 있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꼭 저런 바지를 입어야만 해’라고 생각했던 건.


지금이야 여자든 남자든 바지 끝단을 접어 올려 발목이 보이게 입거나 9부 바지를 입는 일이 흔하지만, (흔한 정도가 아니고 한 겨울에도 복숭아뼈가 드러나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내 발목까지 시릴 정도인데) 내가 그 시절 회색 교복 바지를 접어 입고 나타났다면, 더위를 참지 못한 술 취한 아저씨 같아 보인다거나, 어디서 괭이질을 하다 왔냐는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대학생 때도 이런 스타일의 바지를 입기에는 세미 힙합의 거대한 물줄기에 대항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얼마나 바지를 걷어입고 싶었냐면,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검은색 워커(라고 해봐야 군화이지만)를 신고 고무링으로 바지를 워커 위에 고정시키는 스타일을 보고 ‘너 참 섹시하구나’라고 생각했을까. 그때 결심했다. 제대를 하고 졸업을 하면, 첫 월급으로 꼭 하얀 면바지를 사서 발목이 드러나게 입고 다니리.

  

제대 후 기숙사에 살면서 버스를 타면 이삼십 분 안에 삼청동에 갈 수 있었는데, 문화생활을 한다는 명목으로 가끔 들르곤 했다. 그런데 갈 때마다 왠지 롤업 바지를 입고 수염을 기른, 약간은 거무접접한 이태리 풍의 남자, 그러니까 마치 에스콰이어 잡지에서 나온 듯한 남자, 를 자주(까지는 아니지만)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바지를 그렇게 입은 외국인이 앞에 걸어가는 걸 보고 옆에 있던 일행에게 ‘나도 저런 바지 한번 입어보고 싶어’라고 말했다가 ‘너 따위는 가당치도 않아’ 정도의 대답을 들어야 했다.


하긴, 고등학생 때건 대학생 때건 내가 그 당시 유행이라도 맞춰본 적이 있었던가. 중학교 때 소풍 가기 전 날, 엄마와 싸우면서 청바지 하나를 사 입고 가면, 조금 노는 아이들은 빽바지라고 하며 하얀색 바지를 입고 왔었다. 고등학교 때는 교복 바지를 딱 맞게 줄여 입는 게 유행이었다. 7인치가 괜찮네, 6인치로 줄이니까 발이 잘 안 들어가네 등의 얘기를 하며 옷에 신경을 쓰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그냥 무심한 척 그들의 대화만 엿듣고 있었다. 서울에 대학에 와보니 힙합바지 세상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6인치네 7인치네를 고민하던 나는 헐렁한 스타일에 적응하는데도 다시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전부터, 여자들이 스키니진을 조금씩 지겨워하기 시작하면서 보이프렌드 핏이라는 루즈 핏의 진을 롤업 하여 입기 시작하더니, 슬슬 남자들도 바지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20년 전부터 이러고 다니고 싶었어’ 라며 이번에도 역시 나만의 한 발 앞서는 트렌드 감각에 혼자만 우쭐 해 했지만, 정작 바지를 롤업 해서 입은 건 얼마 전부터다. 입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했지만, 그러려면 바지를 다시 장만해야 했고, (원래 입던 바지를 두 번 접는다면 역시 또 괭이질하다 왔냐는 말을 들을 것 같았으므로) 회사 분위기상 발목을 드러내고 가기에는 아직까지 어느 정도의 용기도 필요했다. 주말에는 반바지만 입었고, 겨울에는 발목이 시려 어차피 짧은 바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더 있었다. 나는 발이 큰 편이다. 발 볼이 넓은 데다 평발이라서 납작하고 못생겼다. 그래서 키에 비해 신발이 큰 편이다. 헐렁한 바지를 입을 때는 이게 상관없는데, 요즘 유행하는 통이 좁은 바지를 입으면 커다란 신발이 유난히 돋보이게 된다. 그런데 바지까지 위로 걷으니 마치 신발이 항공모함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요즘 거리를 나가보면 나보다 더 우주전함 같아 보이는 운동화를 잘도 신고 다니고, 심지어 어글리 슈즈라는 말 그대로 괴상한 신발까지 유행을 하고 있어 나도 이제 별 부끄러움 없이 남들과 같이 (멀리서 보면 신발만 유난히 눈에 띄게) 하고 거리를 걷는다.

이 산뜻함이란!



대학교 때 자주 어울리던 친구 둘이 있는데, 둘 다 서울 주변의 신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키도 커서 옷을 잘 입는 편이다. 그중 하나는 녹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평소 차림으로 명동에 갔다가, 어느 잡지사 카메라에 찍혀서 그 얼굴이 잡지에 나온 적도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우리들은 짜장면 배달하러 갔던 거냐며 놀려댔지만… 전국의 라이더님들 죄송합니다.) 졸업을 하고 얼마 안 돼서 그들을 강남역에서 봤는 데, 리바이스 501 청바지에 유니클로 후드 집업을 입고 있는 건 나 밖에 없었다. 그 날 이자까야에서 오꼬노미야끼를 먹으며 나는 테이블 밑으로 그들이 바지를 접은 방식과 반짝이는 복사뼈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20년을 앞서서 생각만 하면 뭐하나… 남들 다 입을 때도 제대로 못 입는 것을. 패피도 해 본 사람이 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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