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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pr 16. 2019

쿨하게 살긴 늦었어

군대를 제대하니 가장 친하던 대학 동기 두 녀석이 인라인을 타고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쫄쫄이 바지 같은 걸 입고 스피드를 즐기거나 체력 증진을 위해 타는 피트니스 용 인라인은 아니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슬라럼이라는, 왠지 현란해 보이는 기술을 쓰는 스케이팅이었는데 둘 다 꽤나 자유롭게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나는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싶다는 이유로 그 대열에 들어가지 않았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금발의 곱슬머리 소년들은 항상 스케이트 보드를 타지 않나. 그리고 반스VANS 컨버스Converse와 같은 스트릿 브랜드의 광고에는 항상 인라인 스케이트가 아닌 스케이트 보드나오고. 그래서 왠지 '인라인 스케이트는 쿨하지 않은 것'이라고 마음대로 정해버렸다.


'어차피 이걸로 쿨해 보이기는 늦었어.'

게다가 지금은 시작해봐야 그냥 유행이나 좇는 멍청이 중 하나가 될 거라는 식의, 내 멋대로의 기준도 작용했다. 그리고 내가 인라인을 시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저주받은 운동신경. 그것을 배워봐야 친구들만큼 잘 타지 못할 것이 뻔했다. 내가 누군가? 잘하는 운동이 없어 어렸을 때부터 남자애들 사이에 제대로 끼어서 놀아 본 적이 없고, 군대에서 통나무 타고 웅덩이를 건너는 훈련을 하면 매번 물에 빠져 군화가 다 젖어버리던 사나이 아니던가.  


이듬해 나는 스케이트 보드를 배울 거라는 로망과 함께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보드 하나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몇 번 타 보지도 못하고 다리를 심하게 접질려 외국에서 병원 신세를 졌. 다리에 깁스를 하고 돌아와 한 달간 일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멍청히 스케이트 보드만 바라봤다. 깁스를 푼 후, 그것의 자리는 침대 밑이 되었고, 여행 경비가 마련되어 장거리 배낭여행을 떠날 때, 내 첫 번째 스케이트 보드는 침대 밑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직장에 들어가고 넥타이를 한 번에 적당한 길이로 맬 수 있게 되었을 때쯤, ‘태풍태양’이라는 어그레시브 스케이팅(aggressive skating)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그래시브 스케이팅은 슬라럼보다 고난도 트릭을 구사하고, 명칭 그대로 공격적이고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데 그 영화에 반해서 ‘역시 스케이트는 어그레시브가 진리’라는 마음으로, 당장 인터넷을 연결하여 어그레시브 스케이트를 검색했다. 왠지 이 스케이트라면 충분히 간지가 살 것 같았다.


그때는 보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식은 상태였는데, 호주에서의 안 좋은 경험도 있었고, 마땅히 연습할 공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어그레시브 스케이트를 사는 일 역시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래도 내게는 너무 거친 운동이었고, 나는 그것을 연습할 의지나 체력도 없었다. 또 역시 연습할 곳이 없다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었고.


시간은 쉽게 흘렀다. 그 사이 나는 대리가 되고, 과장이 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형광색의 예쁜 크루저 보드들이 인스타와 블로그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동네 공원에 가보니 롱보드 동호회 사람들이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고, 거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보드를 타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나처럼 운동에는 영 잼병인 동생마저 장식용으로 크루저 보드를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그만두고 롱보드 여신이라 불리며 유튜브 스타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행을 보며, 나는 나만 좋아하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가 ‘나는 가수다’를 통해 전 국민의 노래가 돼버려 아쉬워진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단지 몇 번 만져본 게 전부인 스케이트 보드를 마치 일찌감치 마스터한 사람 마냥, 역시 나는 트렌드에 앞서가는 사람이라고 우월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심지어 롱보드는 너무 쉽고 말랑말랑한 차선책이고, 역시 알리나 힐플립 정도의 트릭은 구사할 수 있는 스탠더드 크기의 보드가 진짜 배기지라고 생각하며 마음대로 롱보드를 폄하하기도 했다.  

이 정도 트릭?

초등학생 딸아이를 둔 아빠가 된 나는 지금 피트니스용 인라인 스케이트를 다. 이제 넥타이 정도는 눈 감고도 매고, 더욱이 넥타이 따위야 매지 않고 출근해도 더 이상 눈치도 보지 않는 아저씨가 되었다. 더 머뭇거리다가는 슬라럼이니 어그레시브니 아무것도 못하고 어느 날 빙판 길에 미끄러지져 몇 주일씩 입원을 하는 노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그래서 나만의 ‘쿨’의 기준을 하향 조정한 것이다.


내친김에 스케이트보드도 다시 샀다. 온라인 중고마켓을 뒤적이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아들이 호주에서 사 왔는데 안 타네요’라고 올라온 물건을 만원 주고 들여왔다. 노란색 계열에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그래픽의 데크다. 호주에서 샀던 디자인과는 많이 다르지만 왠지 그곳에 두고 온 물건을 다시 찾은 것 같아 감개무량했다. 이루지 못 한 꿈을 문득 다시 찾은 느낌마저 들기도 했고.


가끔 할 일 없는 주말이면 딸이랑 인라인과 스케이트보드를 가지고 집 앞 공원에 나간다. 혹시 날씨 좋은 주말의 어떤 공원에서 딸과 함께 인라인이나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그렇다고 그 모습이 쿨하다기보다는 왠지 애처로워 보이는 아저씨를 본다면, 맞습니다,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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