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이현 Oct 24. 2019

어설픈 워홀러

프롤로그

2005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호주 브리즈번 공항에 서있었다. 어두컴컴한 공항에서 나오니 강한 자외선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국에 있을 때 보다 1.5배쯤 멋지게 느껴졌다.


호주에 온 둘째 날, 스케이트 보드를 샀다. 백패커스Backpackers에서 만난, 팬티가 다 보이도록 청바지를 내려 입은 금발 곱슬머리의 물건이었다. 새 것의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몰랐지만, 생전 처음 본 보드가 썩 마음에 들었다. 지갑에서 빳빳한 호주달러를 꺼내어 달라는대로 내주었다. 역시 나는 힙해라고 생각하며 다음 날, 나처럼 호주에 막 입국한 귀여워 보이는 일본인 여자애에게 함께 시티를 구경 가자고 했다. ‘아, 외국에 오니 이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그 날을 마지막으로 했던 호주 생활은 끝났다. 데이트는 엉망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지라 소개팅도 하지 않는데, 말도 안 통하는 사람과 하루 종일 낯선 도시를 다니는 것은 무리였다. 그 날 저녁 숙소에서 씨야See ya라고 쿨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 귀여운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호주에 왔다면 역시 농장에서 일해야지 하고 찾아간 곳은 한국인들로 득실거렸다. 사과나 포도같이 예쁘고 그럴듯한 작물을 바랐으나, 그곳은 대파 농장이었다.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파를 뽑는 게 내 일이었다. 3개월 동안 매일같이 해가 뜨기 전부터 파를 뽑자 여행을 갈 수 있는 경비가 모였다. 가이드북을 보며 열심히 세워 둔 계획에 따라 여행길을 나섰다. 이 여행 역시, 상상 속의 쿨한 나와 현실의 찌질한 나의 대비는 엄청났다. 마음은 프로 스케이트 보더지만 현실은 보드 위에 제대로 올라가지도 못하는 내 모습 같았달까. 호주까지 와서 한국인과는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은 쿨하게 날려버린 지 오래였으니 논외로 하자. 상상 속의 나는 매일 밤 백패커스에 있는 바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포켓볼도 치고, 더우면 그대로 수영장에 풍덩 빠지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행하는 두 달 내내 영어를 잘하던 한국인 동행에 의지해 다녔고, 내게 너무나 친절했던 잉글랜드에서 온 어느 커플과 몇 번 얘기를 한 것 말고는, 대화는 대부분 그 동행자와 이루어졌다.

꿈꾸던 워홀 라이프


대미는 마지막 3개월의 어학원이었다. 영어를 못하더라도 어학원에서는 대개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된다. 꼭 서양인은 아니더라도, 일본 사람이라도. 하다못해 한국인이라도 많이 만난다.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금요일 밤에 파티도 하고(여기는 호주니까!), 주말에는 같이 시내에서 햄버거도 먹고. 그런데 나는 한국인 사이에도 못 끼고, 외국인들 사이에도 끼지 못해, 학원 집 학원 집만을 반복했다. 클럽에는 한두 번 가보았지만, 한국 클럽에서도 쭈뼛대던 내가 호주라고 달라질 리는 없었다. 아예 투명인간이 돼버린 기분이었다. 겨우 11시까지 버티다가 인적 없는 거리를 터덜 터덜 걸어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음주운전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fxxxin Chinese!라고 하며 부앙 지나갔다.


아직 여기서 쿨하게 살아보지 못했다고!

학원 등록 기간이 끝나가고, 모아둔 돈이 바닥을 보이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이 곳에서의 쿨한 생활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다. 마지막 몇 개월이라도 서퍼들의 천국Surfers Paradise의 백패커스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 날 번 돈은 그 날 맥주 값으로 다 써버리고, 서핑을 하러 온 쿨 내 진동하는 외국인들과 이메일 주소도 교환하고, 쉬는 날에는 서핑을 배우며 진정한 쿨남이 돼보자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영어도 잘 못하는 나를 스텝으로 써 줄 백패커스는 없었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나 여기서 일하고 싶은데 한번 써볼래라고 할 배짱이나 태연함도 없었다. 결국 내 주제에 서핑은 무슨 이라고 읊조리며, 예정보다 2개월 먼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꽤나 한심했던 호주의 8개월은 그간 내가 살아온 세월과 썩 닮아있었다. 마음만은 힙스터, 현실은 흔한 회사원, 아저씨, 이제 곧 불혹. 40년에 가까운 세월, 참 한결같이 어설프고 어중간했다.


특히나 삼십 대는 엉망이었다. 아들 노릇, 남편 노릇, 아빠 노릇.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결혼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쳤고, 약한 체력을 핑계로 육아를 아내에게 미뤘고,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는 아내와 싸우고, 결국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아파트를 사자는 아내의 말을 무시하고, 전세를 갱신할 때마다 더 변두리로 밀려나며, 천정부지로 뛰는 집값에 절망했다. 매일같이 사표를 쓰고 싶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답시고 주말마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어설프게 목공을 배우고 영어 학원을 기웃거렸다.


그렇게 서른아홉이 됐다. 힙하고 쿨한 라이프는 저만큼이나 멀어졌다. 뭐하나 제대로 이룬 것도 없고, 앞으로 이룰 것도 딱히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평온하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만족할 건 맘껏 만족하기로 했다.


문득 내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자랑할만한 추억 같은 건 없고, 따뜻한 감성을 품고 있지도 않으며, 떠벌릴만한 취향 따위는 더더욱 없지만, 그런 사람의 이야기라도 꺼내놓고 싶었다. 출근할 때 하얀 운동화를 신어도 될지를 고민하고, 겨우 에스프레소 한잔에 차도남이 된 기분에 빠지며, 아직도 스케이트 보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변변치 못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여기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혹시 당신도 비슷하냐고, 사실 대부분 이렇지 않느냐고, 위로를 얻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