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간 딸이 물었다. 영어는 왜 배워야 하는 거냐고.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옆에 있던 장인어른이 대신 답했다. 영어는 세계 공통어니까 배우는 거라고, 영어를 배우면 어디에 가서도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다고. 나도 그런지 알았다. 영어를 잘하면 세계 어느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외국인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 배낭을 메고 외국에 가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여행에 대한 환상이었다. 도미토리 숙소에 큰 배낭을 시크하게 내려놓고 옆에서 잡지를 보는 파란 눈의 외국인에게 ‘Hi’ 하고 첫인사를 건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잘 맞아 며칠을 함께 여행한다. 헤어질 때는 서로의 이메일 계정을 주고받는다(아직 스마트폰이나 페이스북이 나오기 전이므로). 성별이나, 나이가 적고 많음은 중요치 않다. 오히려 머리가 희끗한 노인과 친구가 된다면 더 멋지겠지.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니까. 처음으로 외국 여행을, 그러니까 호주에 일 년여 간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때도 이런 부푼 꿈을 품고 있었다.
이런 로맨틱한 환상을 키워준 건 수많은 여행 에세이들이었다. 글 속에는 항상 만남과 헤어짐, 그리움과 눈물이 있었다. 기차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도 친구가 되고, 중고 레코드 가게에 들어가서도 인생의 대화를 나눈다. 읽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이렇게 추상적이고 심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거지?’
여행의 환상이 깨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글 속의 주인공처럼 대화를 하기에 내 영어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워홀러’의 흔한 레퍼토리. 호주까지 가서 한국인들과만 어울리다 한국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깨닫는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계속 연락할 친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영어가 거의 늘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도 얻은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책 속의 작가들이 꼭 심오하고 낭만적인 영어를 써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됐다. 여행지에서의 로망을 이루기 위해, 즉 외국인 친구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술술 나오는 영어가 아니었으므로.
친구를 사귀려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금요일 밤 집집마다 돌아가며 하는 파티에도 참석하고, 우르르 몰려 클럽에도 가고, 하다 못해 어학원에 가서 일본인 친구들과 점심 도시락이라도 같이 먹어야 한다. 영어 이전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누구를 만나도 별로 할 말이 없다. 특별한 관심사도 없고, 어벤져스같이 누구나 보는 할리우드 영화도 보지 않는다. 가끔 책도 읽고, 음악도 듣지만 이마저도 어설프다. 대개 듣는 음악만 반복해서 듣는데, 정작 흥얼거리는 노래의 제목도 기억하지 못한다. 책을 많이 보는 것도 아닌데, 읽었던 내용은 대부분 까먹는다. 이를테면 이런 형국이다. 어벤져스 시리즈 얘기에도 끼지 못하고, 홍상수 영화의 얘기에도 끼지 못하는. 블랙핑크도 모르고 잔나비도 모르는.
어려운 건 대화거리를 찾아내는 것뿐만이 아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상대방을 알고 싶어 하는 순수한 호기심이 부족하다. 오지랖이 넓지 않다는 말이다. 쉬운 얘기는 아니다. 호기심이 부족한 건지, 나 자신이 깨지는 게 두려워 스스로 꽁꽁 싸매는 건지 알 수 없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 가도 샌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바가지가 아니다. 이리 깨지고 저리 깨지면서, 줄줄 새봐야 새로운 경험도 하고 새로운 친구도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내 안에만 틀어박혀 친구를 못 사귀던 내가, 갑자기 호주에 간다고 해서 잘 사귀게 될 리 없다. ‘BTS 좋아해?’라고 시작할 수도, ‘어벤져스 엔드게임 봤어?’라고 시작할 수도 있겠다. ‘너를 알고 싶어’라는 반짝반짝한 눈망울로 상대를 바라봐야 한다. 내가 조금 깨지고 새더라도 세상을 향해 나를 열어둬야 한다. 영어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다. 진심은 말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영어까지 술술 나온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호주에서는 누구나 영어로 얘기하니까. 호주 사람과 영어권 나라 사람들은 당연하고, 비영어권 사람들까지도 더듬더듬 영어를 사용한다. ‘아, 이래서 국제 공통어라고 하는구나!’라고 느낄 만도 하다.
하지만 세상에 외국이 호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외국인이 영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가 영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지방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니까.
최근에 또 다른 여행 에세이를 읽었다. 홍아미의 ‘너의 언어를 존중한다는 건 너의 세계를 존중한다는 것’, 그리고 김하나의 ‘관점과 태도’. 인도에 간 홍아미 작가는 ‘박시시(적선)’만 반복해 말하는 아이들과 우연한 기회에 대화를 나누고 교감한 순간을 이야기하고, 아르헨티나에 머물던 김하나 작가는 퇴락한 귀족 같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한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것이다. 바로 그 나라의 언어로 그 나라 사람들에게 다가간 것, 그리고 오지랖. 더듬더듬 힌디어로 아이들의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는다. 혹은 초리판(일종의 핫도그) 파는 아저씨에게 에스파냐어로 마라도나를 닮았다는 실없는 말을 걸어본다. 그러자 ‘흑백사진에 총천연색이 입히고, 평평한 사진이 3D 입체 영상으로 바뀌’는, 그리고 ‘태도가 달라지니까, 관점이 변해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영어가 국제 공통어의 위상을 가졌다 한들, 어느 나라에 가서도 ‘Hello’라고만 인사한다면 그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빈약한 영어만큼이나 빈약한 기억일 것이다.
딸에게 ‘영어는 세계 공통어야’라고 말하기가 꺼림칙한 이유다.
호주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도쿄에서 일주일 정도 스탑오버를 했다. 호주에서 일본으로 가는 열 시간 남짓한 사이, 나는 영어 한마디 못하는 호주 여행자에서, ‘이 곳은 영어가 잘 안 통하는군’이라고 말하는 일본 여행객이 되어 있었다. 나는 끝까지 빈약한 경험밖에 하지 못하는 여행자로 남았다.
인용된 책
홍아미, '그래서 너에게로 갔어' (2018)
김하나, '힘 빼기의 기술'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