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입장 정리

군면제 : 축구 팬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만

by 이이현


시간을 거꾸로 돌려준다면 과거로 돌아갈 거야?

따분할 때 종종 하는 이야기. 대부분 남자의 대답은 한결같다. 군대 이전이라면 사양할래. 가까운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 우연찮게 모두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벌써 자식이 군대에 가는 걱정을 한다. 설마, 그때 되면 모병제로 바뀌어 있겠지, 주문처럼 덧붙이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오늘 왜 기분이 좋은지 맞춰볼래?

가까이에 사는 장인어른은 저녁을 드시러 자주 우리 집에 오신다. 장모님과 사별하신 후로는 대부분 티브이로 시간을 보내신다. 그가 손주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이겼을 때. 작년 여름 아시안 게임에서 우리나라 팀이 승리를 이어갈 때는 매일같이 기분이 좋으셨고, 최근 U20 월드컵에서 승승장구하는 한국팀을 보면서도 매우 즐거워하신다.

청와대 게시판에는 결승만을 앞둔 U20 한국대표팀의 군면제를 청원하는 글도 올라왔다고 한다. 장인어른 덕에 별 관심이 없는 뉴스까지 알게 된다.


군대를 제대하고,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세계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사는 유럽 어딘가의 도시를 출발하여 유럽 각지와 아시아를 거쳐 호주까지 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숨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20대가 군대에 청춘을 바치는 동안, 어느 나라의 젊은이들은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대학가에 가보면 유난히 여학생이 많은 것 같다. 생각해 보라, 군대에 가는 나이대 학번의 남자는, 그러니까 올해의 경우 07, 08학번일 텐데, 학교에 없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이야기다. 조만간 18개월로 줄어든다고는 하나, 여전히 1년 반, 2년에 가까운 시간은 인간의 일생을 통틀어도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졸업을 하고 노량진에서 다시 2년을 허비하는 이야기까지 이 자리에서 하지는 않겠다.


군대에 가지 않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배정된 친구가 있다. 허리디스크로 공익 판정을 받았다. 집 근처 구청으로 출퇴근하는 그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가 퇴근해서 집에서 티브이를 볼 때, 나는 훈련소 동기들과 군대를 기피하기 위해 결국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한 유승준을 욕하고 있었다. 다들 훈련소에서 한참 힘들 때였기 때문에 욕의 수위는 상당히 높았다.

우리 회사 팀장님은 김종국을 참 싫어한다. 그렇게 좋은 몸으로, 런닝맨에서는 그렇게 잘 뛰어다니면서, 군대에는 가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허리디스크는 팀장의 관심 밖이다. 같은 이유로 공익 판정을 받은 그 친구도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고 운동도 한다. 그러다 한 번 통증이 오면 집에서 나오지 않거나 절룩거리며 다닌다. 그의 방 침대에는 딱딱한 나무판이 깔려있다.

유승준을 함께 욕하면서, 김종국이 싫다는 팀장님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나도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고 싶다고.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하지는 않겠지만, 정당하게 공익근무요원으로 빠질 길이 있다면 백방으로 알아봐야 할 일다.

허리디스크면 군대를 안 가는 게 맞다


축구를 즐겨보지 않는다. U-20 월드컵 역시 한 경기도 (하이라이트 영상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승패에 한 주의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장인어른은 끝끝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이 진 날은 분해서 잠을 못 이루실 정도이다. 글쎄, 어렸을 때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가 대표팀의 선전을 본인의 자랑처럼 여기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운동선수들의 군면제 소식을 들으면 왠지 헛헛해진다.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우리들, 그러니까 세계를 빛 낼 논문까지는 아니지만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 리포트를 제출하고, 크게 우리나라를 빛 낼 직업은 아니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야근을 안 하면 신나서 퇴근하는 고작 우리 같은 사람의 2년은 지워져도 된다는 것인가, 하는 마음에서다. 국가 대표팀의 군 면제가 싫다기보다, 나도 면제를 받고 싶다는 편이 맞겠다.


축구 팬이 아니라서 드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군 면제 같은 소리가 와 닿을 리 없다. 사실 유럽리그에서 맹활약하는 손흥민 선수에도 내 눈으로 그의 경기를 본 적이 없으니 별 감흥이 없다. 대단하네, 정도의 생각은 한다. 정말 대단하긴 하다. 재능도 있겠지만 엄청난 노력의 결과물일 것이다. 재능과 노력, 정신력과 자기 관리 어느 하나 빠져서는 가기 힘든 위치이다. 그래도 그가 군대를 가는지 안 가는지는 내 관심 밖이다. 나는 벌써 갔다 왔는데 뭐. 이미 일주일에 내 연봉의 세배를 벌어들이는 그의 커리어를 내가 걱정해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축구팬이라면 그의 플레이를 보지 못한다는 게 조금 아쉬울 수는 있겠지만.


축구보다는 피겨 스케이팅을 보는 게 좋은 나는 차라리 피겨 여왕 김연아를 면제시켜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군대를 가지 않는다. 그럼 이제 여자들도 군대를 가면 될까? 군대 얘기의 단골 메뉴. 글쎄, 나는 그렇게 논리적인 사람은 아니다. 축구 광팬이었다면 우리 흥민이 군대 면제돼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다 모르겠고, 나도 가기 싫은 군대, 헌재에서도 위헌이 아니라는데, 사실 그렇게 현실성도 없는데, 굳이 안 가도 되는 여자까지 우격다짐 보내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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