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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Jun 10. 2019

맘충 H과장 : 신경 쓰면 어디 나갈 수도 없어요

  토요일 멜버른 동물원을 가려고 기차에 올랐다. 맞은편에 앉은 3살과 6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 둘이 떠들며 계속 장난질이다. 옆 자리엔 칭얼대는 갓난아기를 안은 엄마가 있다. “애들 좀 조용히 시켜요!” 누군가 나타나 버럭 할 듯하여 혼자 좌불안석이지만 다들 평화롭다.
  한국은 아이들에게 잔인한 사회였구나, 아들의 입막음 용으로 만땅 충전해온 아이패드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나를 진정시킨다.   
  - 엄마란 사람이 뭐 하는 거야, Hye Jung Lee



  어느 나라에 또 ‘맘충’이란 말이 있을까? 회사 동료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오기 전까지 그 단어는 인터넷에서만 떠도는 줄 알았다. 두 살배기 아들을 키우는 아빠였다. 대화는 ‘나도 애기 키우지만,’으로 시작되었다. 나도 아기를 키우지만, 식당이나 카페에서 애들을 시끄럽게 두는 부모들을 보면 이해가 안 간다는 말. 자녀들을 모두 대학에 보낸 부장님이 거들었다. 맞아, 요즘 개념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듣고 있던 여섯 살과 세 살배기 엄마인 H과장이 조심 스래 답했다. ‘그렇게 신경 쓰면 애 데리고 어디 나갈 수가 없어요.’

  H과장이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을 모았다.

  ‘H과장도 맘충이었네.’


  딸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기나 어린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접해볼 일도 거의 없었고, 그저 조금 시끄럽고 성가신 존재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딸이 태어난 후로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바뀌었다. 아기와 어린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가끔 왠지 정이 안 가는 아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놀이터에서 가서 모르는 아이들과 같이 놀다 보면 대체적으로 모든 아기들은 귀엽고, 모든 어린이들은 순수하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술래를 해달라며 모여드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본다면 말이다.

  이런 아이들이 공공장소, 특히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공공의 적, 아니 ‘어른의 적’이 된다. 칭얼대고, 시끄럽게 조잘대며, 심지어 식당을 뛰어다니기도 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첫 2년은 매우 힘들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약한 아내는 하루 종일 보채는 아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게 변했고, 나 같은 경우는 혼자 살던 ‘싱글 모드’에서 항상 아기 먼저 생각해야 하는 ‘아빠 모드’로 전환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돈이 아까워서라도 카페에 잘 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아내와 데이트를 하던 관성이 있어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또 육아에 녹초가 된 아내와 회사에서 지쳐서 돌아오는 나 모두 저녁에 집에서 밥을 짓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외식을 자주 해야 했다는 말이다.

  가능하면 홀이 넓은 식당을 택했다. 아이가 조금 칭얼대더라도 옆사람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공간. 아기가 조금씩 기어 다닐 수 있도록 좌식 테이블이 있는 곳이라면 더욱 좋았다. 테이블 주변으로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간혹 큰 소리로 울거나 시끄럽게 할 때에도 딱히 혼내면서 조용히 시키지는 않았다. 몇 번 타일러 보고 그래도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저 안아서 식당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카페에는 가급적이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의 낮잠 시간과 맞아떨어지면, 자리가 편한 카페에 가서 아이를 한쪽에 눕혀놓고 커피를 -이 경우에는 무척 달달한 커피여야 하는데- 마시는 호사도 부렸다. 물론 때로는 아이가 칭얼거려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아이가 싫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아이와 실랑이하는 것도 힘들 만큼 심신이 지쳐, 소란을 피워도 내버려 둔 적도 있다. 이런 우리 모습도 누군가의 눈에는 ‘맘충’ (아빠충, 혹은 부모충이라고 해야 하나?)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에너지가 넘치고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며, 조잘조잘 떠들어야 하는 게 그들의 룰이고 그들의 예절이다. 어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다행히 어른은 아이보다 힘이 세다. 그리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자명하다. 자연스레 아이들은 어른들의 틀에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힘이 더 셌다면, 그들도 그들의 카르텔과 조직을 구축할 수 있었다면 아이들의 틀에 어른들이 맞춰야 했을 것이다. ‘너흰 너무 조용해. 좀 움직이라고!’


  성인들의 세계를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나도 시끄러운 건 질색이다. 본인도 자식을 키우니까, 나도 다 키워봤으니까, 자신들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싶은 마음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기본적인 에티켓도 지키지 않거나,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무리한 서비스를 요구하는 등의 심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바로 옆에서 식사를 하는데 버젓이 똥 묻은 기저귀를 식탁에서 갈거나, 아이를 위해 있지도 않은 메뉴를 달라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H과장이 ‘그렇게 생각하면 애 데리고 어디 나갈 수도 없어요.’라고 했다 해서, 그가 이런 류의 행동을 하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너무 눈치를 보면 한도 끝도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H과장은 아니더라도 상식 이하의 사람들은 생각 외로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진상’이다. 아이의 유무에 관계없이 어떤 식으로든 진상을 부리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진상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풀자는 말은 더욱 아니다. 노인에게는 노인들의 세계가, 대학생에게는 대학생들의 세계가, 중년 부부에게는 또 그들의 존중받아야 할 세계가 있다. 아이들의 세계 역시 다르지 않다.  


   ‘맘충’이란 단어까지 쓸 일은 아니라고, 두 아빠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서두의 인용글 : 브런치  

https://brunch.co.kr/@hyejunglee9jv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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