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테마기행 아트로드에서 프로방스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영상이 나왔는데 오래 전 오베흐 쉬오아즈로 홀로 떠났던 그곳으로의 여행이 떠올랐다. 고흐가 거닐었을 밀밭을 뙤약볕에 걸으며 무척이나 평화롭고 고요했던 그날의 냄새, 향기, 햇살, 풍경들. 지금까지도 여전히 내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때의 황홀경을 잊지 못한다. 오르세 미술관 고흐의 초상화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동시에 퐁피두에서 열리고 있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전시회에서 기괴한 형상의 그림들 앞에서 사람들과 뒤섞여 한참을 아무 생각없이 한참을 바라보고 집으로 왔던 기억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고흐의 영혼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그는 영적인 사람이구나.를 알게 된다.
지나간 추억과 기억들을 잠시라도 붙잡는 것은 유익하다는 생각이 있다. 마치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듯 그 시절의 기억으로 잠시라도 빨려 들어가 아름다웠던 기억들에 미소짓게 되고 또 그때의 황홀경이 현재를 살, 나아갈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오늘 아침 메이크업을 하다 피부가 조금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푹 잘 자서도 있겠고 요즘 며칠 먹는 걸 관리해서일까.싶다. 양이 줄었다. 먹는 양이 이전보다 줄었다. 내 몸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적확하다. 내 몸이 적게 먹는 것을 원했다. 소식한다는 말을 해본적이 없을만큼 먹성이 좋았는데 얼마전부터 적게 먹기 시작한 것이다. 희한하리만치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차고 주전부리나 자극적인 음식이 당기지 않는다. 먹어도 한입이면 족하게 됐을만큼 나의 이 작은 변화가 무척이나 반갑다. 배가 금세 포만감 가득하고 먹은 직후에도 몸이 무겁지 않은데다 속은 이토록 편하니 나의 마흔 이후의 식습관은 분명 소식으로 자리잡지 않을까싶다.
어느 날은 무언가 꽉 막힌 듯한 기분이 들곤한다. 일시적이면서 즉흥적인 순간의 감정인데 그럴 때면 갇힌 듯한, 옴짝달싹 못하는 나 자신 도대체 왜 그러한가?라는 질문이 절로 인다. 무엇이 너로 하여금 이토록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가?하는 근원적인 물음에 가깝다. 결국 내가 행동하지 않아서. 내가 편안함과 안정을 선택해서라는 걸 잘 안다. 내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라는 것도 안다. 1월이어도 행동하지 않는, 다시 스러지는 나 자신에 대한 자책과 비난이 몰려올 즈음 몸을 서둘러 움직인다. 침대 안을 박차고 일어난다.
무감각해지는 것은 아닌지. 무심함과 덤덤함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안녕한 것인지. 자문해보곤 한다. 괜찮아졌다 다시금 우울감이 밀려오는 것 또한 있는 그대로 보는 수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몸을 움직이는 것뿐이다.
나에게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입춘이 오기 전까진 숨을 고르고 좀 더 살뜰하게 내면에 귀 기울여야지.하는 것과 몸의 움직임을 활발히 하자는생각이 있다. 당장 눈 앞의 것보다 멀리 내다 볼 줄 아는 지혜와 혜안을 상기한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비관하면 할수록 더 갇히게 된다. 같은 상황이라도 긍정적으로 보고 감사할 줄 알면 관점을 달리하면 완전히 딴 세상이 된다. 내가 바라보는 대로 펼쳐지는 세상이란 걸 알아차리면 감사함 가득한 사랑 가득한 삶을 살게 될텐데. 금세 망각하고 알아차리기를 반복하는 인간의 삶이다.
생각이 많은 내게 개운법은 자기 돌파다. 내 안의 것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계속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 자기 돌파란 거창하고 획기적이거나 대단한 것이 아닌 내 안의 믿음과 신뢰와 사랑으로 점철된 나아감이요, 몸의 움직임을 통한 실천력, 적극적이고 즉각적인 행동이다. 많은 생각을 잠시나마 잠재우는 즉각적인 방법은 알아차림이다. 명상도 내겐 이와 같다.
몸의 움직임과 명상은, 독서와 글쓰기는 내게 확실한 개운이 되어준다. 나를 알고 이해하는 것. '나'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허상이라는 걸 알면 이토록 깃털처럼 나라는 육체와 삶이 가벼워지는 마법.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순간순간이 내겐 수행이고 수행처 그 자체다.
나의 숙명이랄까. 내게 주어진 임무랄까. 자기 돌파를 통해 끊임없이 수행해야하는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외려 삶이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라기보다 경험해야 하는 세계라는 느낌이 있다. 내 삶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나의 선택도 이해하게 된다. 이제 더는 지난 시절을 후회하지 않고 그 시절 또한 아름다웠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다는 감사함이 있다.
내 운명을 사랑하는 자는, 내 운명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자는 자기 자신 나름의 지리한 내면과의 대화와 고독을 아는 자일거란 생각이 있다. 내 운명이여,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운전을 하다가도 나는 절로 이런 말들이 나온다. 그럴 때면 지금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싶으면서도 이게 나인가? 내가 하는 말인가?싶으면서도 너무도 자연스레 제3자처럼 관조하게 된다.
때로는 내 안의 것을 과감하게 부수는 일, 절대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내 안의 것을 깨뜨리는 일, 기존의 것에서 나와 새로운 세계에 담그는 일, 건너가는 일, 그 자기 돌파란, 지금 내가 해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