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강황솥밥
숙면하면 눈이 벌떡 떠지는 건 물론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신묘한, 그 특유의 개운함이 있다. 꼭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된 듯한 기분이다.
눈 떠보니 새벽 5시 반.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곤 밤새 불려놓은 병아리콩을 삶았다.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도 정겹다. 창문 너머 푸스름한 바깥 풍경, 잔잔하게 불어오는 새벽 바람, 공기, 새들의 지저귐 모든 것이 조화로울 수가 없다. 일렉트로닉 팝으로 이 아침 나의 부엌에 생기를 더한다.
세탁기도 돌렸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삶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 내가 지금 살고 있구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밥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 내 삶과 일상을 내 스스로가 알뜰히 살뜰히 챙기고 있다.는 마음과 동시에 이런 게 삶이지.한다. 그러다보면 내 집안 공기와 온기, 물건들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소중하고 만족하게 된다.
다 마른 빨래를 갠 후, 옷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옷을 다 끄집어내 하나하나씩 다시 갰다. 혹시 입을까 싶어 넣어둔 옷들도 과감히 버렸다. 옷가지들이 조촐해지고 나니, 단출해지고 나니, 개운하다. 가뿐하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 남기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취향과 태도가 한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분명해 보일 때가 있다.
상쾌한 토요일 아침, 한 두 시간 새 소소하게 사소하게 잔잔하게 꽤 많은 것들을 해놓았다. 이런 종류의 시간의 알뜰함과 촘촘함은 날 기분좋게 한다. 내 삶의 만족감을 높인다.
단호박 강황솥밥
감사한 것 중 하나는,
진심으로 내 안에,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십대, 아니 삼십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마음이 많이 불안했고 우울했고 아파했고 쉽게 상처받곤 했는데 지금의 나는,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내가 됐다. 단단한 내가 됐다.
나를 안다는 게 뭔지. 도대체 나를 사랑하는 법은 어떻게 아는거야?라고 할만큼 방법도 나를 알아가는 법도 날 사랑하는 법도 헤매기 일쑤였다.
깨닫게 됐다.
삶의 고통은 필연이라는 것.
시련도 겪어봐야 성장할 수 있다는 것.
실패는 당연하다는 것.
몇 년 전부터 나는 삶에서 오는 고통과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됐다.
그러고 나니,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싹 사라졌다.
내 마음에 한동안 머물렀던 우울이 이제는 이토록 감사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지금의 내.가 될 수 있게, 더 깊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게 하려고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그 고통과 상처 시련이 날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함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런 과정이 내 삶에 있어봐서. 나는 이제 그 무엇이 내게 오든 두렵지 않다. 내면을 다스릴 줄 알게 됐고 깨닫게 된 것들도 있고 그 깨달음으로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나.로 어떤 상황에서도 내 중심을 붙잡고 마음만은 평온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고독.이 좋다.
혼자가 좋다. 혼자가 편하다.
고독은 외로움의 시간이 아니라, 날 더 외롭지 않게 한다.
날 성장하게 한다.
변함 없는 나. 흔들리지 않는 나. 참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내가 행복하다.고 자주 느끼는 이유는, 놓아버릴 줄 알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고 툭.하고 내려놓는다.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기대나 크게 바라는 것도 없어졌다.
놓아버림. 힘빼기. 수용하기. 인정하기.
내려놓는 다는 것. 사실 별 거 아니다.
내려놓으면, 놓아버리면 세상이 훨씬 쉬워진다.
세상을 이해하기 쉬워진다.
내 삶에서 고독, 놓아버림은 죽을 때까지 나의 벗.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