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을 열었다. 어제 늦은 밤, 유기농 자두를 사왔다. 모양도 작고 투박했지만 자두가 날 불렀다. 자두 2팩과 천도 복숭아 1팩을 사왔다.
늦은 밤, 자두가 날 부른데엔 다 이유가 있겠지. 신기한 건 며칠 전부터 자두가 먹고 싶었다. 집 앞 로컬푸드 직매장보단 새벽시장 과일이 싱싱하고 저렴한데다 같은 값이면 양도 좀 많다는 생각이 있어 새벽시장에 갔다와야지 하고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다 어젯밤 마트에 들렀다 자두가 날 부르니, 마음이 이끄는대로 냉큼 사왔다.
그러곤 오늘밤 나와의 인연이다.했다. 내일 점심 자두 샐러드를 만들어야지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눌린 자두 3개로 자두 드레싱을 만들었다. 커피 한 잔을 내렸고 소파에 기대 앉았다.
나름 반짝반짝였던 커리어우먼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땐 진짜 나보다는 보여지는 나에 집중했고 또 그래서인지 나답지 않은 모습일 때가 많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헤어스타일에서부터 옷에서부터 액세서리부터 신발, 가방까지.
그땐 또 무언가 프로페셔널한 느낌이랄까. 하이웨스트 스커트에 깔끔한 블라우스나 셔츠 차림의 출근이 으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시절, 아니 어쩌면 그렇게 주입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내 스타일의 귀걸이를 하고 갔는데 "초아씨 그런 귀걸이는 가급적이면 하고 다니지 말아요."했다. 그렇게 말한 선배 언니들의 귀걸이는 내 것보다 훨씬 화려했던 걸로 기억한다.
각 개인의 개성을 외려 튀는 것으로 간주하는.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라는 당시 그런 분위기 내지 문화를 나는 꽤 오랜시간 견디기 힘들어했다. 직장에서 튀지 않고 무난하게 지내려면 옷차림이든 액세서리든 단정해야 하고 최대한 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나는 아주 자주 그런 말들을 주변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무엇이든 새 것보단 옛 것을 좋아하는 성미가 있다. 직장생활 하면서 내가 진짜 나다울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던 유일한 시간은 주말이었다. 주말이면 이태원 앤틱 가구점에 들러 유럽이나 미국에서 100년은 족히 넘은 고가구들을 신나게 마음껏 구경하는 일. 빈티지 그릇과 접시들을 구경하는 일이 내겐 소소한 여유이자 취미기도 했다.
어느 덧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 나이 들어가며 좋은 점은 인생이란, 진짜 나를 알아가는,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과 그 믿음이 확고해지면서 나란 사람이 선명해지면서 20대와는, 30대 초반과는 완전히 다른,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소녀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남의 시선 따위에 신경쓰는 일일랑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지 오래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진짜 나, 참나에 오롯 온전하게 집중하며 알아차리며 매 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온전하다. 아름답다. 감사하다.는 걸 깨닫고 의식하고 늘 깨어있으려고 하는 시점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내가 살고 싶은, 가고 싶은 삶의 방향과 가치관과 태도가 명료해지면서 내 삶은 간결하게, 단출하게, 소박하되 낭만적이게, 군더더기 없게 내 스스로의 삶이 이젠 아름답다고 자신있게 말할 있을만큼 나는 변했고 그 삶의 패턴이 편안하게 자리잡았다.
나는 더 이상 새 옷을 사지 않는다. 새 옷을 사지 않은지 꽤 되었다(마음에 드는 요가복은 사는데, 루즈한 요가복이 일상복이 돼 버린지 오래다). 내 스스로도 놀라운 건, 이젠 어느 옷가게 매장을 가도 전혀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인데, 지금의 내 옷이라 하면 편안한 치마와 편안한 요가복이 전부다.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불편해하는 성미라 요가복도 펑퍼짐하고 루즈한 그러면서도 수수함과 멋스러움이 살아있는 바지를 즐겨 입는다.
옷장을 열면 가짓 수가 한 눈에 들어올 만해도 내 눈엔 이마저도 충분하고 만족스럽기 그지 없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옷감 텍스처와 디자인, 색감의 옷들만 남아서인지 이토록 멋스러울 수가 없으며 애정 가득담아 깨끗하게 빨아 탈탈 턴 뒤 햇볕에 빳빳하게 바삭하게 바짝 말린다.
그러곤 사랑 가득 담아 고이 접어 색깔별로 서랍장에 차곡차곡 쌓는다. 이때만큼은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된다. 고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는 내 옷들을 보고 있자면 기쁨과 행복감이 일순간 밀려오는 놀라운 경험을 나는 이렇게 아주 자주 한다.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다. 어쩌다 하나를 사더라도 그것의 가격이 비싸든 싸든 내 기준은 나름 철저한 편이다. 실용적일 것. 필요한 것일 것. 내가 입고 싶은 것일것. 내 취향의 것일 것. 내가 60대가 돼서도, 할머니가 돼서도 멋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다보니 내 옷에 대한 애정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집착과는 다르다. 이제 나는 내 옷들에게 말을 걸기도, 나와 늙어서도 함께하자며 사랑을 보내기도, 깨끗하게 정갈하게 살뜰하게 대한다.
끌리셰하지만 명품만 입으면 무엇할까. 우선은 나란 사람 자체가. 내가 명품이어야지.라는 생각이다. 저렴한 옷이어도 입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어디서 샀는지. 으레 비쌀 것이라고 생각해 짐짓 내게 물어볼 떄가 있는데, 그럴때면 나는 마치 아주 큰 일을 해낸 것처럼 내 나름의 알뜰함과 살뜰함에 뿌듯해하기 일쑤다.
아주 중요한 자리거나 공식적인 자리가 있을 때도 이런 류의 옷을 입고 나가는데 사람들이 나의 옷차림이 세련됐다고 혹은 예쁘다고 말하면 마치 천 원짜리 옷을 십만원 짜리 옷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을 부린 듯, 나는 이런 쪽으로 재주가 있는게 틀림없다며 속으로 흐뭇해 한적도 여러 번이다.
살면서 느끼는 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면 내 스스로의 삶이 보다 선명해진다는 것. 내 스스로가 내 삶과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지금 내 옷장과 서랍에 있는 옷들은 한 눈에 보아도 몇 장인지 셀 수 있을 만큼의 가짓수 인 것은 물론 색깔별로 잘 정리도 되어있다. 이렇게 되면 내게 꼭 필요하고 내가 좋아하는 옷들만 남게 되기 때문에 함부로 옷을 사는 일이 없으며 새 옷을 사는 일이 더더욱 없게 된다.
확실한 건 지금 내 옷장의 옷들은 내 머리가 하얗게 쇤 할머니가 되어서도 지금과 같이 나를 멋지게, 나만의 색깔과 향기와 취향과 개성을 가진 아름다운 할머니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내 믿음은 확고하다.
내가 입은 옷이 몇 천원이건 몇 만원 짜리건 몇 십만원 짜리건 몇 백만원 짜리건 그게 무엇이 중요할까. 그건 내가 가진 것이지 진짜 내가 아닌 것을. 내가 입었을 때 그 이상의 옷으로, 명품 옷으로 만들면 그게 바로 찐 멋쟁이가 아닐까. 멋진 사람이 아닐까.하는 내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내면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나만의 분위기와 아우 있는 사람이 되자.는 내 삶의 철학이 이렇게 내 일상 곳곳에, 옷에 까지도 알뜰살뜰하게 적용되는 삶을 느끼고 있노라면 이젠 내가 진정 내 살믜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구나.라며 내 스스로에게 무한한 사랑을 가득담아 보낸다.
결국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있다.
내 멋에 사는 삶, 자유로운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