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벅터벅. 오늘의 발걸음이 심상찮다. 평소 발걸음으로 내 기분을, 무드를, 정신상태를, 컨디션을 체크하곤 한다. 천근만근 쌀 20kg포대 하나를 등에 메고 걷는 기분이다. 무겁고 축축 늘어지는 기분이 선명하다. 점심 먹고 산책 좀 갈까 했지만 지금 컨디션으로 보아 조금 걷다 곧장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일 것 같아 괜히 무리하지 말자. 그냥 좀 쉬자.하는 마음에 다시 침대 위로 점프했다.
먹고 눕고 잠깐 잤다가 설거지 했다가 책 읽었다가 청소했다가 결국 다시 침대 위로 점프. 한가로운 일요일의 흐름이었다. 저녁 6시가 좀 넘어 벌떡 일어나 옷을 채비하고 집을 나섰다. 일단 나가자. 걷다 보면 금세 나오길 잘했어.! 할거야!. 그렇게 늘 걷는 산책길을 한 삼십여분 걸었을까. 오늘따라 도저히 힘이 나지 않는다. 기운나지 않는다.
분명 스멀스멀 우울의 기운이 올라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꼭 그런 기미인데... 아니되지. 이렇게 보낼 수 없지.하고선 그 길에 발걸음을 돌려 아이스 카페라떼(시럽 2방울)를 테이크아웃했다. 이 한 모금이면 금세 기분이 좀 나아진다는 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발걸음은 여전히 터벅터벅. 무겁다. 외려 집에 도착해 앉으니 기운이 더 차려진다. "그래, 무리할 거 없어. 이러면 이러는대로 저러면 저러는대로.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몸과 마음 좀 잠시좀 가만두면 안 되겠니? 정말이지 마음 편히 그냥 아예 쉬어버리지 못하겠니?... 내려놓자..." 그러곤 다시 한가로운 밤에 젖어들고 있는 중이다.
자연스레 아이스 카페라떼 한 잔이 저녁 식사가 되어준다. 얼음과 얼음이 서로 포옹하는 소리, 달그락달그락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그리고 본래의 고요가 4중주를 이룬다. 내 몸과 마음도 이와같이 조화로워야 할텐데. 토닥토닥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알아차림이다. 지금 어떤 기분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몸의 반응은 어떤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 아이스 카페 라떼를 마시고 있는 나, 내 앞에 펼쳐진 테이블, 노트북, 텀블러, 무선 마우스, 리모콘, 쿠션... 마치 제3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눈이 눈을 볼 수 없듯이.
장을 봐오면 소분하거나 프렙해놓는 걸 즐기는데, 1인 가구에게 대파 한 단은 부담스럽다. 그래도 대파 한 단을 사는 것이 경제적이라 산다. 대파를 다듬어 몇 단은 3-4등분해서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는 총총 썰어 냉동실에 보관해 두고 요리할 때 꺼내 쓴다.
오전에 대파를 총총 썰면서 순간의 몰입을 경험했다. 단순작업이 주는 몰입과 그 끝엔 설명할 수 없는 멍함 그러나 상쾌함, 개운함, 기분좋음이 있다.
사소하고 이토록 시시하고 심심할 수 없는 일상에 이런 류의 장치를 마련해둔다.
시시한 하루라고 해서 아무 것도 아닌 순간이 아니다. 이토록 시시한 하루여도 이토록 우울감이 몰려오는 하루도 내 삶 그 자체고 순간이고 기억이고 시절이고 나날들이다.
이런 날 일수록 일찍 잠들어야 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모드로 푹 잘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활기찬 순간들을, 일상을, 하루를 씩씩하게 이어나갈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