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의 사색 2

by Aarushi

#28인치 캐리어 3개로 이삿짐을 싼다

이불갈이를 했다. 계절이 바뀌기도 했고 새마음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서다. 서른 후반, 지금 내게 남은 것이라곤 정말 필요한 물건들, 살림살이들 뿐. 비우고 비웠는데도 또 비울 건 없는지 둘러본다. 침구갈이는 산뜻함을 준다. 개운한 기분이다. 운기가 금세라도 확 바뀐 기분이다.


지금의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어디론가 떠날 사람처럼. 그러나 두 발은 땅에 딱 붙어있는 상태로 살아간다. 삶이라는 파도가 절로 일도록, 삶이 알아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마치 제3자가 바라보는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삶을 대한달까.


28인치 캐리어 3개로 내 살림살이를 설명할 수 있다. 이케아 2인용 패브릭 소파는 언제든 놓고 가도 좋을만큼 비워도 좋을 만큼 꽤 오래 잘 썼고 테이블이며 그마저도 몇 개 되지 않는 굵직한 것들은 비워도 그만인, 아쉬움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어쩌면 내 삶이 더욱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실은 전혀 안정적이지 않은 내 살림살이, 내 삶이다.


무엇이 그리 많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잘 만 살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서른 중반이 돼서야 알게 된 것들이 많았는데, 사람 사는데 그리 많은 게 필요 없구나!. 무릎을 탁 친적이 있다. 실제 지금의 내 삶이 그러하다. 개인적 취향이겠고 성향이다. 개인적으론 이토록 단출한 것이 잘 맞았던 것이다.


생각이 이토록 많은 사람인데 삶이라도 단출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비우면 비울수록 나는 왜 더욱 채워지는 걸까?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이 곧 비움이란 걸 깨닫게 됐다.


단출한 살림살이의 좋은 점은, 내게 꼭 필요한 것들만 있다는 것. 그래서 더욱 물건을 살 때 덥석 사지 않게 된다. 내게 꼭 필요한 것인지. 불필요한 건 아닌지. 단지 예뻐서라는 이유로 덥석 사는 일은 드물다. 꺄악. 이건 정말 사야해. 이건 정말이지 내 취향이야.하는 것 외엔 쉽게 사지 않는 성미다.


수건도 순전히 내 취향의 것으로 5벌 있다. 그릇도 많이 비웠고 지금은 도자기 머그컵까지 합해 5개 있다. 서른 후반의 나를 보자면, 스무살의 초아가 보면 놀랄 일이다^^할 때가 있다. 무튼 변했고 갈수록 나날이 나다워지고 있다.


캐리어 3개로 이삿짐을 꾸릴 수 있어서 삶이 이토록 가벼울 수가 없다. 두꺼운 겨울 패딩이며 옷가지들도 압축하면 충분히 캐리어로 감당된다. 직장인 시절에 입던 블라우스와 스커트, 미들힐, 모두 비운지 오래다. 가끔 청바지에 힐을 신으면 높아진 키 만큼이나 더 아름다워보이는 효과가 있긴 한데, 이마저도 힐을 벗으면 살아질 것임을 안다. 진짜 아름다움이란 힐을 신었든 신지 않았든 내 스스로가 나를 아름답게 바라보는, 사랑하는, 존중할 줄 아는 태도에서 나온다는 걸 알아서인지. 운동화를 신었을 때 발이 가장 편하고 안정적이다.


굵직한 것 몇 개를 제외하곤 이삿짐이 28인치 캐리어 3개로도 충분한 것을 보면, 단출함과 간소함이 이토록 적성이었구나.한다. 나에게 집중하기 시작한 후부터 있어 보이고 싶은, 세련돼 보이고 싶은, 예뻐 보이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약하디 약해졌다. 남과의 비교가 지난 시절 날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똑바로 서지 못하게 했는지. 너무도 잘 알아버린 덕분이다.


여전히 우울하고 여전히 상처받고 여전히 힘겨워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은 모두 다 내가 만든 것이다. 모두 다 내게서 온 것이다. 내가 행동하지 못한 것이고 내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결국 정체도 지연도 막힘도 다 내가 만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만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내가 만든 것이든 절로 펼쳐진 것이든 절로 흘러가는 것이든 내 앞에 펼쳐진 일련의 사건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일, 인정하는 일, 수용하는 일... 내겐 지혜고 삶의 통찰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길이다.


인위적 소음 없이 창밖 너머 보슬비가 어딘가에 부딪혀 나는 소리... 처마 기둥 어디엔가 부딪혀 나는 마찰음 속에 방 한 켠 우두커니 앉아있다. 발은 쭉 뻗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 살아있는 나를 알아차린다. 삶이란 그런 것. 혼잣말도 했다가 처절하게 우울했다가 처절하게 희망을 보고선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의지를 불태운다.


부쩍 침체기다. 어떻게서든 감정에 너무 깊이는 침잠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대로 받아들이되, 의식적으로 너무 깊이는 빠지지 않겠다는 건 내 일상을 지켜내겠다는 삶의 현현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확실히 날 치유한다. 보슬비가 내려도 우산 없이 맨발로 1시간을 걷다 왔다. 보슬비가 내려도 그러다 잠깐 소나기가 내려도 작은 숲속의 나무들이 절로 우산이 되어준다. 그들의 팔을 내어준다. 내가 너무 젖지 않도록, 쫄딱 젖지 않도록, 적당히만 젖도록, 조금이라도 더 그들과 함께 하도록 견딜만큼 걸을 수 있게...


비가 꽤 내렸음에도 젖지 않았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 촘촘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데도 신기하다. 어쩌다 한 두 방울 젖을 뿐, 너와 나의 연대가 이토록 단단한 거였을까. 이 작은 것에서도 사색이 인다.


사색하고 사유하는 삶은 다채롭다. 고루하지 않다.


자연과 부쩍 가까이인 요즘, 진지하게 묻는다. "정말 제주에 가서 살까?" 내려 놓을게 많지 않아서, 28인치 캐리어 3-4개로 이삿짐을 쌀 수 있어서, 단출한 살림살이어서 어디에 살든, 어디로 가든 내게 이사란 이토록 가뿐한 것이다.


어디에 살든,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파리에 살아도 내 마음이 괴로우면, 지옥이면 그곳은 더는 낭만적인 도시가 아니게 된다. 어느 시골에 살아도 내 마음이 행복하면, 다정하면 그곳이 낭만의 도시가 된다.


인생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꼭 마흔이 다 되어서야 알게 되는 것들일까? 깨닫게 되는 것들일까?


내적인 슬픔, 괴로움, 침체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날 옥죈다. 옥죄어지는 것도 삶의 일부겠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더욱 가까워지는 것들에 대하여.


삶은 내게 받아들이라고.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본래 지구 여행자 신분이라서 내려놓을 것도 가질 것도 없다. 인간답게 사는데 필요한 것들이면 충분하다. 누구에게도 의지하고 기대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혼자 꿋꿋하게 씩씩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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