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인생 A4 한 장 요약 ㄱㄴ?
글 | 미지 참으로 미안하고 또 웃긴 경험인데, 사춘기 시절 같은 반 남학생으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은 적 있다. 거절에 능하지 못했던 10대의 나는 용기있게 마음을 고백한 그 친구의 면전에 대고 “어…나는 너 싫은데!”라고 외쳤고, 그 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싫다’는 말 말고 마음을 받아줄 수 없는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해줬더라면 어땠을까. 뭐가 됐든 대놓고 싫다는 말보단 나았겠지.
“귀하는 불합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개씩 지원한 회사로부터 불합격 통지서를 받는 요즘 그때 그 친구의 상처받은 얼굴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왜 떨어졌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보완할 점은 무엇인지 이렇다할 이유도 없이 불합격이라는 세 글자만 떡하니 써있는 메일과 그 남학생에게 무작정 “너 싫어!”라고 외쳤던 나는 왜 닮아 보이는가. 이유 없는 거절은 받아들이기 더 어려운 법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두 번의 취업 준비 기간 동안 셀 수도 없는 불합격 통지서를 받아와서 상처가 되진 않는다. 다만 궁금할 뿐, 나는 왜 떨어졌을까.
자소서에는 정답이 있다
내 이력을 간단하게 나열해 보자면, 20대 중반 여자로 4년제 지방 국립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각종 아르바이트와 대외활동을 경험했다. 한국잡지교육원에서 진행하는 에디터 양성 과정 수료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1년 동안 작은 신문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가지고 있는 자격증은 운전면허증, 한국사자격증, KBS한국어자격증, 한자실력급수증이 있다.
나는 이것들을 최대한 늘려 A4 용지 한 장에 가득 채워야 한다. 돈이 필요해서 아무리 더러워도 참고 했던 아르바이트는 일을 사랑하는 프로페셔널한 사회인이 되는 준비 과정이 되고, 인간에 대한 불신을 남겨주었던 대외활동은 팀워크의 중요성을 알려준 소중한 경험이 된다. 복수전공으로 지원했던 문예창작학과에 3번이나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단일전공은 학과 공부를 깊게하기 위한 자발적 선택이 되고, 결석 허용 숫자를 아슬아슬하게 맞춰 수료한 5개월 에디터 양성 과정은 꿈에 다가가기 위한 성실한 도전이 된다. 자소서는 ‘그냥’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했던 모든 경험을 곱씹어 배운 점을 발견해야 하며 하물며 실패한 경험에서도 극복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순도 100%의 진실로 적어서는 안 된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 인간들의 이기심과 사회의 추잡함을 배웠다고 써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성격을 쓰는 문항 역시 같은 맥락이다. 솔직하게 곧이곧대로만 쓰면 평생 합격 메일은 받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 같은 MBTI에서 본 내 성격의 단점은 뭐든 쉽게 질리고, 황소 고집에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그대로 자소서에 옮겨 적는다면? 서류 광탈에 기름을 붓는 격이겠지. ‘자소서 언어(다시 한번 말하겠는데 자소서에는 정답이 있다)‘로 고쳐 적어보자면 쉽게 질리는 성격을 새로운 일에 망설임 없이 도전하는 대범함으로, 황소 고집을 강한 독립심과 같은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로 달리 표현해야 할 것이다. 이마저도 직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단점이라면 다른 단점을 골라야 한다. 한국의 대부분 기업은 특이하고 눈에 띄는 직원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나만의 독특한 감성과 취향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쯤되면 자소서는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할 줄 아는 능력을 보는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새로 써보는 ‘진짜’ 자소서
한 톨의 거짓과 과장 없이 자소서를 쓴다면 아마 이렇지 않을까.
26살이고요, 여자입니다. 남동생이 있는 K-장녀예요. 어려서부터 양보를 주입식으로 교육 받았죠. 이것 때문에 피해의식이 좀 남아있나봐요. 차별에 민감하죠. 회사 내 성차별, 저는 참지 않습니다. 하지만 책임감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죠. 어렸을 때 골목 대장을 한 경험이 있어요. 또래 친구들을 모아 동네에 버려진 쓰레기를 자진해서 줍고 밤에는 순찰을 돌았어요. 이렇듯 저는 책임감과 리더십, 정의감을 갖춘 사람이랍니다.
반대로 사춘기 시절에는 조금 소심해졌어요.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이죠. 주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어요. 아가사 크리스티, 히가시노 게이고, 애드가 앨런 포 등등 무시무시한 살인과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림을 좋아해서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저는 간신히 먹고 사는 가정의 K-장녀였어요. 비싼 학원비를 댈 수 없었죠. 그래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글을 전공으로 선택했어요. 그땐 인문학도가 이렇게까지 취업이 어려울 줄 몰랐나봐요! 대학생활 역시 저의 성격처럼 후다닥 해치웠어요. 호불호가 확실한 편이라 좋아하는 과목은 높은 점수를 받았고 그렇지 않은 과목은 점수가 아주 가관이죠. 성적이 어중간한 이유예요.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과 학비를 벌었어요. 덕분에 남의 돈 받아 먹고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됐죠. 놀기도 엄청 놀았습니다. 적어도 회식 3차까지는 끄떡없어요. 현재 가장 뿌듯한 점은 학자금 대출이 없다는 거예요! 열심히 벌어서 학교에 고스란히 내고 왔죠.
어때요? 책임감이 남다르고 일도 잘할 것 같지 않나요?
나를 나로 만들어주었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거짓 0%의 새로운 자소서를 완성했다. 확실한 건 합격과는 먼 자소서라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거절 당할지도 모르는, 아니 거절 당할 게 분명한 자소서를 쓰며 나를 포장하는 데 공을 들인다. 합격 메일은 언제쯤 내 메일함에 들어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