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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와 찰리 Aug 26. 2020

[술로 빚은 인간관계] - 2 여름밤 맥주

친구의 소중한 시간을 망쳐버릴까 봐 걱정하는 나, 어른이 된걸까요?

글 | 미지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미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자랑하는 친구 앞에서 부러워해 주기. 주말에는 전화보다는 문자로. 만나서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하지 않기. 외적인 변화 먼저 알아봐 주기.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가도 막상 지켜주면 고맙게 느껴지는 사소한 행동들이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나는 언제부턴가 이런 미덕들을 장착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아마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부터겠지. 


저번 주말에 고등학생 때 자주 놀던 친구 3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친구A는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고 있고 친구B는 나와 같은 취준생이며 친구C는 직장을 다니고 있다. 메신저를 통해 토요일에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날리고 일요일에 우리 집에서 만남을 가졌다. 일을 하고 있지 않은 A와 B는 초대에 응했지만 C는 만나는 당일까지 연락이 없었다. 고작 1년이지만 직장을 다녀본 경험으로 미루어 직장인에게 주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C는 사회초년생이었다. 그가 없으면 없는 대로 놀려고 했지만 괜히 우리끼리 만나는 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심스레 C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4번을 반복해도 받지 않자 취소 버튼을 눌렀다. 


‘자고 있으려나… ….’


나머지 두 친구와 나는 단념하고 캔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일요일이 다 가기 전에 C에게서 답신이 왔다. 전화했었냐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가겠노라고. 단체 메신저 방에 간결하게 올라온 C의 답신은 내가 대학생쯤만 됐어도 무척 서운해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C의 답변을 보고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든다. 편히 쉬고 있었을 텐데 전화로 방해했구나. C의 답변 뒤에 그가 부담스럽지 않게 답신을 남긴다. 


“그래. 다음에 떡볶이 먹으러 와.” 


나와 A, B, C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친구였다. 쭉 한 동네에 살고 있으며 가끔 만나 길게 보는 유형의 친구들이다. 그들과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술이 먹고 싶으면 당장 불러내 번개 모임을 가졌다.  


~따르릉~

“지금 뭐하냐.”

“왜 술 마시게?”

“응. 간단하게 치킨에 맥주 콜?”

“오케이. 지금 준비하고 나갈게.” 


지금은 각자 일을 시작하고 다른 친구들과 모임이 많아지고 애인을 사귀면서(나는 아니지만) 시간 맞춰 만나기도 힘든 사이가 됐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서운한 감정은 없다. 각자의 시간을 존중해 주는 친구들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하다. 다만 학창 시절 팽팽하게 우리들을 이어주고 있었던 선이 자연스럽게 느슨해지고, 선을 조이는 행동이 부담으로 다가오는 나이가 됐다는 사실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어른이 된 걸까.     


최근 여기저기에서 '부캐(원래 캐릭터가 아닌 또 다른 캐릭터)'의 활약이 돋보인다. 사회의 요구에 맞춰 자기 자신에 덧씌우는 다른 인격을 의미하는 페르소나가 있었다면 지금은 바야흐로 부캐의 전성시대다. 나 역시 성인이 되면서 하나 이상의 부캐를 만들어 냈다. 아니, 정확히는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밝고 친절한 부캐1(주로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나타났다), 늠름하고 리더십 있는 부캐2(나보다 어린 후배나 동생들 앞에서 활약하는 날이 많았다), 신속하고 변화에 민감한 부캐3(지난 1년간 회사를 다니는 내내 활동했다. 나와 가장 먼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에서 부캐의 사용은 편리하기도 했지만 부캐가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평소보다 많은 피로감을 느꼈다.  


직장을 다니며 어쩔 수 없이 부캐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몇 가지 부캐들은 나의 ‘본캐’가 되려고 시도했다. 당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을 만날 때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오는 부캐 때문에 스스로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일례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건치를 내보이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짓는 날은 나조차도 역겨웠다(당시 친구들이 나의 미소를 보고 그렇게 표현했었다.) 나의 의식을 둘러싼 부캐와 본캐의 권력 다툼은 회사를 다니는 내내 계속됐다. 어떤 날은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런 혼란은 회사를 관둔 후 본캐로 활동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고칠 수 있었다. 이젠 아무 때나 부캐가 튀어나오는 일은 없다. 다행히 지금은 친구들에게 느끼하고 유해한 미소를 짓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나와 나의 친구들은 고등학생 땐 없었던 선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이 그들의 시간을 방해하고 귀찮게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해보는 단계를 거치게 됐으니. 


~카톡!~

-시간 있으면 이번 주에 같이 맥주 한 잔 할래?

-이번 주는 면접이 있어 힘들 것 같다ㅜㅜ

-나도 약속이...

-나는 다음 주까지 내리 야근ㅡㅡ 


여름밤에는 뭐니 뭐니 해도 맥주와 넷플릭스다.


요즘 같이 비가 많이 오고 습한 날에는 탄산 가득한 맥주가 제격이다. 시원한 생맥주와 바삭한 감자튀김은 상상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당장이라도 친구들을 불러내 함께 갈증을 풀어내고 싶다. 하지만 곧 잘 시간이니까, 일주일 중 가장 힘든 수요일이니까, 몸 관리하는 친구도 있으니까… 아, 그냥 혼자 마셔야겠다. 이젠 맥주 정도는 혼자 마실 수 있는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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