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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와 찰리 Aug 05. 2020

[사담쓰담]대청소 기록기 -창고 비우기

가난한 우리집 창고가 가득찬 이유

글 | 찰리

삼 남매의 K장녀인 나는 어릴 때부터 ‘내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스물세 평 아파트에 여섯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우리 가족에게 ‘자기만의 방’은 있을 리 없었다. 내게 허락된 공간은 나름반짝거리고 희귀해보이는 잡동사니로 가득 찬 작은 옥색 몰딩의 서랍장뿐이었다. 늘 막연히 내 방, 내 옷장, 내 물건들로만 가득 찬 공간을 꿈꿨다. 서로 양해를 구하고 빌려 쓰거나 나눠 쓸 필요가 없는 것들 말이다.


우리 집 경제의 총책임자인 엄마께서는 ‘가성비 좋은’ 물건들과 살림 선배들이 물려준 것들로 창고(실제 창고는 없었지만)를 채우셨다. 나는 주로 창고의 물건들을 입고 먹고 쓰면서 자랐다.

그래서인지 자취는 신세계였다. 엄마가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얻은 전세방이었으므로 온전한 나의 독립은 아니었지만 우리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게 기뻤다. 여전히 서로 온전히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여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우리 전세방 역시 부모님 주머니에서 나온 공간이었다. 작은 가구들부터 베란다 한 귀퉁이에 모아놓은 각종 생활용품까지 어느 순간 이곳도 엄마의 존재감으로 채워졌다. “이거 떨어질 때 된 것 같아서 싸길래 사 왔어”라는 말은 항상 덤으로 덧붙여지면서.

자식들을 타지에 보내 놓고 마음이 쓰였을 우리 엄마. 하지만 자취방에 오실 때마다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오시는 게 난 늘 속상했다. 엄마 아빠는 한평생을 근검절약으로 살아오신 분들이다. 빚 하나 없이 공무원 외벌이로 우리 삼 남매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당신들 욕구는 지워버린 채 가족을 위해 한 평생 가성비 있는 선택을 하셨다. 돈이 용천에서 샘솟듯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면 미래는 항상 불안하기 마련. 한 달에 버는 돈은 정해져 있고 챙겨야 할 식솔이 주렁주렁 달린 집의 경제권자는 단돈 몇백 원이라도 아껴야 한다. 갑작스러운 소비보다 예측하는 소비는 부담이 적은 법이니까 가성비 있는 물건들을 번들로 사서 쟁여놓는다. 미래의 쓰임을 위해 오늘의 엄마는 과거의 당신이 그랬듯이 이 작달만한 자취방에도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저장했다. 나는 그것이 삶의 여유가 없었을 우리 엄마 그 자체 같아서,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스무살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난 절대 돈을 모으지 않았다. 용돈도 제대로 받아본 적 없던 내게 주어진 몇십만 원의 돈은 나를 충분히 부자로 만들어 줬다. 지하상가에, spa샵에 가서 옷을 잔뜩 고르고, 안 먹어본 음식도 사 먹어봤다. 쓸모보다는 소유에 방점을 두고 온갖 물건을 모았다. 난 가성비 같은 거 안 따진다고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돈도 써본 사람이 쓴다고, 내가 우리 엄마 딸인데 그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일을 시작하면서 정기적인 수입을 얻고 나서 보니 나는 돈을 쓸 줄을 모르는 애였다. 내 지출 목록은 기본적인 걸 제하면 가끔 친구들이랑 밥 먹고, 때때로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보러 다니고, 어쩌다 적금을 타면 여행을 가는 게 전부다. 쇼핑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는다. 스무 살부터 각종 아르바이트와 직장생활로 8년째 돈을 벌면서도 한 번에 10만 원 이상 지출은 오랜 고민이 필요한 소인배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열심히 사재낀 예쁜 쓰레기들을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끌어안고 살았다. 열 평 남짓 우리 집도 결국 물건으로 가득 찼다. 심지어 가성비마저 떨어지는 것들로. 내 힘으로 돈을 벌고 쓰면서 나는 물건으로 채워지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정리가 필요해.


우연히 유튜브에서 <신박한 정리>라는 예능을 봤다. 자칭 타칭 정리의 귀재 신애라는 책은 10년 이전의 것은 꼭 보관하고 싶은 것만 빼고는 처분하고, 이름이 박힌 상패도 사진을 찍어 남기고 버린다. 그야말로 ‘신박’한 그의 정리법에서는 “설레지 않으면 버리세요”라고 말하던 곤도 마리에도 떠오른다. 이에 반해 맥시멀리스트 박나래는 “언젠가 쓸 것”이라고 변명한다. 익숙한 말이다. 추억이랍시고 버리지 못했던 것들, 어딨는 줄도 몰라 이사 갈 때나 찾아낸 물건, 아끼고 아끼다 결국 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tvN 예능 <신박한 정리> 장면 캡처

라면이 유통기한이 다 돼 버려본 적이 있는가? 치약이 유통기한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는가? 이사 갈 때가 되어 발견되는 아까워서 못쓰고 있던 물건들, 대체 왜 보관했는지 모르겠는 절대 안 읽는 전공 서적들, 일 년에 한 번 입을까 말까 하는 난감한 디자인의 옷들까지. 방송을 보고 우리 집을 둘러보니 이건 물건 집에 내가 또 세 들어 사는 격이다. 난 이제 날 표현할 물건이 없어도 내 존재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없어도 사는데 문제없다면 갖는 것에 집착하지 말기로 다짐했다.


사회 초년(이라고 하기엔 난 좀 중고지만) 자취생에게 '비우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이다. 이렇게 물건을 모은다면 해가 거듭할수록 계속 늘어날 텐데 그럼 더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지 않을까. 내 집 마련은 언감생심, 서울에서 ‘전세’를 구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나같이 자주 거처를 옮겨 다니는 사람은 짐이 없을수록 이득일 수밖에.


우리 엄마, 아빠는 비록 당신들은 빠듯하셨지만 결코 자식에게는 부족함을 물려주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셨다. 덕분에 나는 넘치지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잘 성장했다. 그래서 나는 내 창고를 물건이 아닌 여유로 채워보려 한다. 집과 마음 모두를 비우는 이 대대적인 대청소는 물건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엄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엄마, 다음 달부터는 생활비 좀 더 보낼게. 아끼고 절약하는 건 이제 내가 할 테니까, 엄마도 이제 좋은 거 사서 쓰셔!”

100L 종량제 봉투를 꽉채우고 나니 마음에는 그만한 여유가 생겼다. |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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