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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와 찰리 Oct 14. 2020

[1인칭주인공시점] 셜록 홈즈의 여동생

여성, 관계가 아닌 이름으로 남기

글 | 찰리


셰익스피어에게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진 누이, 이를테면 주디스라 불리는 누이가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 사실은 얻기 어려우니까 - 상상해보도록 하지요. 셰익스피어 자신은 문법 학교에 다녔음이 거의 확실합니다. …(중략) 그는 연극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무대 출입구에서 말을 돌보는 시종으로 연극 생활을 시작했지요. 곧 그는 일자리를 얻었고 성공적인 배우가 되었으며 우주의 중심에서 살았습니다. …(중략) 그동안 특별한 재능을 가진 누이는 집에 남아있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녀도 셰익스피어만큼이나 모험심이 강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세계를 알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지요.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에서 (이미애 옮김, 민음사)


지금은 책을 잘 안 읽지만, 이래 봬도 어릴 적에는 위인전깨나 읽었다. 세종대왕, 이순신부터 윈스턴 처어칠, 베에토벤, 페스탈로찌(그 때 그 표기법이다)까지…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니 내가 아는 위인 중 여성은 많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유관순, 신사임당, 나이팅게일, 퀴리부인 정도인 것 같다. 이들은 각각 독립운동가, 예술가, 간호사,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지만 '누나'나 '어머니', 순백의 '천사', '부인' 등의 수식어가 왠지 더 익숙하다. 심지어 신사임당(본명 신인선, 사임당은 호)과 퀴리부인(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Maria Skłodowska-Curie)은 본명도 아니다.


이름을 남긴 이들마저 제대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존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스러진 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상상한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처럼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라져 간 여성들은 내 주변에서도 너무 흔한 일이라 새롭지도 않다.

마리아 스크워도브스카를 인간적으로 조명한 뮤지컬 ‘마리 퀴리’ | 라이브
셜록 홈즈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넷플릭스 영화 '에놀라 홈즈'

나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광팬이다. 소설집 셜록 홈즈를 포함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영화 버전,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드라마 버전 등을 아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려봤다. 소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타 셜록 콘텐츠들은 기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변주했다. 2010년 작 영국 BBC 드라마 <셜록>(Sherlock)은 시대적 배경을 19세기(소설)에서 21세기로 옮겨왔고, 2012년 작 미국 CBS 드라마 <엘리멘트리>(Elementary)에서는 백인 영국 남성인 존 왓슨을 아시안계 여성 조안 왓슨(배우 루시 리우)으로 설정했다. 많은 셜록 홈즈 기반 작품들은 사립탐정 셜록 홈즈, 조력자 왓슨, 그의 주변 인물들(형 마이크로프트 홈즈, 베이커가 하숙집 주인 허드슨 부인, 레스트레이드 경감, 모리아티, 아이린 애들러 등)을 재구성해 만들어졌다.

한때 나를 잠못들게 한 드라마 <셜록> | BBC

지난 9월 23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에놀라 홈즈>는 기존 셜록홈즈 세계관에 특별한 인물을 더했다. 셜록 홈즈에게 영특한 여동생 '에놀라 홈즈'가 있었다면, 그의 곁에는 좀 '특이한' 어머니 '유도리아 홈즈'가 있었다면?

에놀라 홈즈 동명의 소설(왼쪽)과 영화 | 위키피디아, 넷플릭스

<에놀라 홈즈>는 동명의 시리즈 소설이 원작이다. 원제는 'The Enola Holmes Mysteries'(에놀라 홈즈 미스터리)로 국내에는 '에놀라 홈즈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총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된 추리소설 '에놀라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2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북미 영 어덜트 작가 낸시 스프링어(Nancy Springer)의 작품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라고.


'에놀라'라는 이름은 어머니 유도리아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Alone'(혼자)을 뒤집은 말이다. 직접 지은 이름처럼 유도리아는 항상 에놀라에게 혼자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이들이 사는 시대는 아직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지 않은 19세기 말이지만, 유도리아는 딸에게 집에 있는 모든 책을 읽히고 무술, 실험, 예술 등 다방면적인 '홈 스쿨링'을 실시한다. 에놀라의 친구이자 스승인 유도리아는 어느 날 갑자기 홈즈가를 떠나고, 그의 두 오빠 셜록과 마이크로프트가 에놀라의 신변처리와 사라진 유도리아를 찾기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유도리아와 함께할 때는 모험과 존중의 공간이었던 집이 오빠들이 돌아오자 자유를 억압하는 답답한 공간으로 변한다. 첫째 오빠는 대놓고 유도리아의 교육 방식을 폄하하며 에놀라에게 '똑바로' 살라고 당부한다. 둘째 셜록은 에놀라의 편인 듯 아닌 듯 별 관심이 없어 뵌다. 결국 에놀라는 유도리아의 가르침을 새기고 집을 떠나 직접 유도리아를 찾기로 결심한다. 집을 나와 사는 것이 처음인 에놀라에게 세상은 위험천만하고, 끝도 없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하지만 에놀라는 이름처럼 '혼자' 씩씩하게 위기를 헤쳐나간다.

왼쪽부터 영화 <에놀라 홈즈>의 셜록, 에놀라, 마이크로프트 | 넷플릭스

에놀라는 둘째 오빠 뺨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런던의 거리에서 여성이란 투명인간과 같기 때문이다. 덕분에(?) 에놀라는 정체를 숨기며 원하는 목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오히려 그의 행보를 방해하는 것은 무시무시한 킬러도, 숨겨진 빌런도 아닌 가부장제 그 자체였다. 큰 오빠 마이크로프트는 에놀라의 겁 없는 행적이 자신에게 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그에게 현상금을 걸어 잡으려 한다. 친오빠가 동생에게 현상금을 걸다니! 그것도 자기 체면 때문에. 그러고는 제발 ‘정상적으로’ 신부수업이나 받으라고 말한다. 에놀라는 눈앞에 닥친 위기와 모험을 그간 쌓아온 재기와 체력으로 헤쳐나가지만 공기처럼 만연한 가부장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유도리아는 에놀라가 '지워지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에놀라를 위해 변화된 세상을 선물하고 싶었던 유도리아와 그 가르침을 통해 성장한 에놀라. 이들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영화를 확인하시라!

에놀라(왼쪽)와 유도리아 | 넷플릭스
가부장제와 '이름으로 남을 자격'

조선 중기의 시인 이옥봉은 뛰어난 문예 실력을 가져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한 남자를 사랑해 그의 첩이 된다. 이옥봉의 남편 조원은 아내가 시를 짓는 것이 남편의 체면을 깎아먹는다며 절필을 요구하고, 이옥봉은 10년 간 시를 일절 쓰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여인이 남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글을 몇 자 써줄 것을 요구했고, 이옥봉은 시를 쓴다. 이 사실을 안 조원은 이옥봉을 쫓아내고, 실의에 빠진 이옥봉은 이후 시를 쓴 종이로 둘둘 감긴 사체로 중국 동해에서 발견된다. 그의 몸을 감은 종이에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쓰여있었고, 적힌 글이 모두 명작이라 명나라 사람들이 책으로 엮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가부장제는 수많은 여성의 존재를 지웠다. 여성을 남성에 종속된 존재로 보거나 평가절하했다. 관계가 아닌 이름으로 남는, 이 간단한 일에도 보이지 않는 자격이 존재한 것이다. 지금은 다를까? 에이 설마 당연히 다를 것이다. 지금은 조선시대도, 빅토리아시대도 아닌 21세기이지 않은가.


사진 출처| 넷플릭스, BBC, 위키피디아, 라이브

참고 자료|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천재시인, 이옥봉',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 홈페이지

함께 보기| 뮤지컬 <마리퀴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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