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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와 찰리 May 27. 2020

[타미의 기력회복] 여배우는 오늘도

2년 차 뮤지컬 덕후의 다짐

글 | 타미


"남성 배우만 나오는 공연은 많지만 누구도 특이하다고 여기진 않았어요.
여성 배우 4명만 나온다고 하니 신기하다고 놀라더라고요. 오히려 그게 신기했어요.
남성만으로 구성된 공연 있다면, 여성만 나오는 공연이 있는 건 당연한 것 아닐까요?"  -뮤지컬 배우 최현선


2년 전, 공연장에서 일하며 뮤지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다. 눈 앞에서 배우들이 직접 노래하고 연기를 하는데, 그 생생한 현장감에 압도되어 뮤지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뮤지컬을 덕질하는 2년 동안 소극장부터 대극장까지 세어보니 총 32편의 뮤지컬을 관람했다. 두 번 이상 본 것까지 포함하면 4-50회의 공연을 본 셈이다.


뮤지컬은 대부분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여성 서사는 물론, 여성이 원톱 주인공인 극도 드물다. 여성이 주연 롤을 한다 해도 대부분이 남 주인공에 헌신적인 성녀, 공주, 혹은 남 주인공을 유혹하는 창녀, 마녀 등 남성 캐릭터를 뒷받침하는 수동적인 역할이다. 그리고 불필요하게 긴 강간 장면이나 남배우가 ‘여장’을 하고 나오는 드랙퀸 공연을 보면서도 불편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만 원이 넘는 거금을 들여가며 공연을 보러 다닌 핑계는 다양했다. 내용은 좀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니까, 연기를 잘하니까, 노래가 좋으니까, 무대가 화려하고 재밌으니까.


그래도 최근에는 시대의 흐름과 요구에 발맞춰 젠더 프리 캐스팅 (gender free casting; 배우의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캐스팅)을 하는 공연도 있고, 나아가 여성 서사극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젠더 프리 연극  <오펀스>, 여성 서사 뮤지컬 <마리 퀴리>, <리지>


올해 3월, 여성 최초 노벨상 수상자인 마리 퀴리를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마리 퀴리>를 관람했다. 주인공은 과학자 마리와 라듐 시계 공장 노동자인 안느이다. 나는 두 인물이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첫 장면부터 울고 말았다. 여자 둘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꿈을 꾸고 우정을 나누는 노래를 부르는 공연은 처음이었다. 여성의 성장, 여성 간의 연대를 그린 뮤지컬 <마리 퀴리>의 객석은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가득 차있었고,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이어졌다.


공연을 마치고 집에 온 뒤, 공연에서 느꼈던 벅찬 감동을 이어가고 싶어서 뮤지컬 <마리 퀴리>를 유튜브, 커뮤니티 등 온갖 포털에 검색했다. 그러다 <마리 퀴리>에 출연한 배우들이 엄청난 부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 공연이 잘 안 되면 여성 서사극은 안 된다는 이미지가 박힐까 봐 굉장히 걱정을 했다"
 -뮤지컬 배우 이봄소리


"대학로에 여자 극이 굉장히 드물어요. 여자 이름을 건 타이틀 극을 몇 번 못 봤어요. 굉장히 부담도 많이 되고 압박도 크지만 기대가 많아요. 우리 여배우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걸 잘 해내야 하는데라는 마음이 커요."
 -뮤지컬 배우 김소향


성장하는 남성, 남성 간의 우정을 보여주는 공연은 워낙 많기 때문에 그런 내용의 새로운 공연이 올라와도 아무도 그걸 남성 서사의 도전, 모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여성 서사극은 공연 하나의 성패를 여성 서사극 전체의 성패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제까지 수많은 불편한 공연들을 한 사람의 관객으로 소비해줌으로써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공연계에 나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좋아했던 공연들, 배우들, 넘버들을 한 번에 포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더 열심히, 전투적으로 여성 서사극을 소비하기로 마음먹었다. 또 다른 여성 서사극들이 끊임없이 계속 나와서 남성이 주인공인 만큼 여성도 주인공을 할 수 있도록, 여성 배우를 여배우로 부르지 않도록, 더 이상 여성 서사극이 하나의 장르처럼 여겨지지 않도록.


* 사진 | 뮤지컬 <마리 퀴리> 프레스콜

** “여자만 나오는 공연도 있어야죠, ‘리지’처럼요”, 20.05.09, 국민일보, 박민지기자

*** 뮤지컬 <마리 퀴리> 프레스콜

**** '마리 퀴리' 김소향 "새로운 발견에서 오는 만족감 크다", 19.12.30, 뉴스컬처, 이지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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