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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와 찰리 May 20. 2020

[1인칭주인공시점] 퀸 말고, 킹을 꿈꾸는 여자들

요즘 보는 웹툰 3개

글 | 찰리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웹툰 열풍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다. 한 반에 스마트폰 유저가 삼분의 일도 안되던 때지만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교수용 컴퓨터로 새로 올라온 웹툰을 함께 보는 것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명문대 경영학부에 재학 중인 주인공 홍설과 의뭉스러운 선배 유정, 유정의 유년기 친구 백인호 등을 주인공으로 한 캠퍼스 미스터리 로맨스 장르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치즈인더트랩’은 경영학부를 지망했던 십 대의 내겐 동경과 환상 그 자체였다. 친구들과 유정파, 백인호파 나뉘어서 시시콜콜한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홍설에 나를 대입하면서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와 돈은 없지만 잘생긴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가상의 대학생활을 선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난 꿈에 그리던 경영학부에 진학하는데 성공한다. 다만, 제 아무리 유정과 백인호라도 절대 올 수 없는 ‘여자대학교’로 말이다.

네이버 웹툰 ‘치즈인더트랩’

현실은 ‘치즈인더트랩’이 아니라 ‘트랩오브과제’였고 웹툰은 자연스럽게 멀어져 갔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가져다준 끝없는 시간은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로 날 인도했고, 결국 웹툰의 세계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양한 작품이 있었다니! 그중에서도 웹.알.못이던 나를 유료결제까지 하게 만든 마성의 세 작품,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삼) '유리의 성'(다우, 해원, 언덕) '냐한남자'(올소)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 아래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
네이버 웹툰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는 황태자비를 목표로 완벽한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 메데이아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여자 프시케에게 이 자리를 빼앗기며 복수를 다짐하는 궁중 서스펜스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한 남자를 두고 두 여자가 경쟁하는 ‘여적여’ 구도가 쉽게 연상되지만, 이 작품은 메데이아와 프시케라는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 서사를 심도 있게 풀어 반전을 거듭하면서 ‘진짜 복수’ ‘진짜 적’의 윤곽을 드러낸다.

왼쪽부터 프시케, 메데이아

메데이아, 프시케는 모두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메데이아는 복수를 위해서는 아들을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악녀의 대명사고, 프시케는 어두운 성에서 밤에만 남편(에로스)을 만날 수 있었던 수동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웹툰 속 메데이아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혹독한 교육으로 명석한 두뇌와 임기응변, 무술 능력, 계략 등을 모두 갖춘 일명 ‘사기캐’로 변주된다. 그는 위기를 직면했을 때 스스로의 힘으로 맞서 싸우고, 시련을 통해 더 강한 인물로 거듭난다. 프시케 역시 신화에서처럼 수동적 인물로 등장했지만 정반대의 인물 메데이아를 통해 각성한다. 두 인물은 일련의 사건으로 몸이 바뀌게 되면서 서로의 입장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의 매력적인 점은 목표를 빼앗긴 메데이아와 사랑을 꿈꾸던 순진한 프시케의 적이 사실은 서로가 아니며, 그들을 구원하는 것 또한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메데이아의 욕망, 프시케의 무력함의 원인은 같은 곳에서 기인하는데, 적을 파악한 두 인물이 연대를 통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남자는 황제가 될 수 없는 나라
카카오페이지 ‘유리의 성’

‘유리의 성’은 여자만 황제가 될 수 있는 가상의 왕국 ‘우제국’을 배경으로 선황의 실정으로 힘없는 황제가 된 유리가 황후 재서의 권력을 꺾고자 후궁 선발전을 벌이는 황궁 암투극이다. 이 작품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처럼 미러링* 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대대로 태양신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 중 여성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거나, 벼슬을 오르는데 성별의 제한은 없으나 고위 관직은 여성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는 점, 극 중 남성들은 남성성의 상징인 목젖 가리개를 착용해야 한다는 등의 설정이 있다.

*미러링(Mirroring), 당연히 여겨졌던 것도 성별만 반전하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전시하는 행위


황권을 다지려는 황제 유리, 황후 그 이상의 자리를 꿈꾸는 재서, 후궁 선발전에 참여한 어머니의 반역으로 노비가 된 흑주성 왕자 도하를 통해 기존의 남성 중심 서사에서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의 한계점을 역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왼쪽부터) 유리, 재서, 도하

유리는 지지기반이 약하지만 지성을 발휘해 강력한 황제를 꿈꾸는 캐릭터로 남성 인물로는 흔한 설정이지만 여성이라는 점에서 신선하다. 우제국은 상당히 성차별적인 나라이다. 유리라는 인물은 절대 선을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의 서사에 몰입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성별 반전 자체가 독자의 욕망이 반영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황제를 꿈꾸는 황후 재서는 똑똑하고 권력 기반도 있지만 황족이 아니고 남성이기 때문에 황후 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런 설정은 성별로 차별받는 것의 부당함을 부각하지만, 댓글을 읽어보면 다수의 독자는 그렇다고 재서가 황제가 되는 것을 응원하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위에 언급한 ‘하루만 네가 되고 싶어’를 볼 때와 대비되는데, 극 중 차별의 주체가 남성일 경우에서는 타고난 성별에 부여된 한계점을 극복하려는 여성 캐릭터를 응원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한계점을 극복하는 여성’이 판타지라면, 후자의 경우 ‘여성 우위 세계관’ 자체가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후궁 후보 흑주성 왕자 도하는 어머니가 반역자로 몰려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사랑을 믿고(아직까지는) 시련이 닥쳐도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고 하는 일명 ‘머릿속이 꽃밭’인 캐릭터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이 없는 인물이다. 소위 “예쁘지도 않고, 배경도 별 볼일 없지만, 당신만을 사랑하는, 좌충우돌 왈가닥(더 심하게 말하면 민폐)” 등의 수식어로 표현되는 인물인데 이런 설정의 여성 캐릭터에 우리는 너무 익숙하다. 도하를 통해 이런 인물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는지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도 숨겨진 서사는 있는 듯하다.)


왕을 꿈꾸는 공주
네이버 웹툰 ‘냐한남자’

‘냐한남자’는 위의 두 작품에 비해서는 재기 발랄한 분위기의 웹툰이다. 주인공 보미가 주운 고양이가 사실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냥국’의 왕자 ‘김춘배’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설정으로 인간과 더불어 살고 있는 냥인(고양이 인간), 멍인(개 인간)들과의 에피소드를 그린다.

왕자라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눈물도 많은 데다 보미 바라기인 왕자 김춘배도 매력적이지만, 내가 주목하는 캐릭터는 춘배의 정혼자 냥국의 공주 ‘영철’이다. 영철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정혼자를 찾기 위해 인간 세계로 온다. 영철을 본 춘배는 겁에 질리는데, ‘영철’이라는 강인한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원하는 것은 꼭 이루고 마는 공격력 상급의 직진형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클리셰처럼 보미-춘배-영철의 삼각관계가 되면 어쩌나 하던 독자의 염려는 비웃기라도 하는 듯 영철은 춘배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다. 적자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냥국의 전통 안에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꿈꾸었을 뿐이다. 영철은 욕망과 실행력을 가진 조연으로 분량은 적지만 고유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기존의 클리셰를 벗어난 캐릭터가 다수 등장하는 ‘냐한남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는 인물이다.


*


영화 산업에서 성차별, 특히 여성이 적게 나타나는 현상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벡델 테스트’(Bechdel-test)라는 것이 있다. 1985년 뮤지컬 <펀 홈>(Fun Home)의 작가 앨리슨 벡델의 만화 ‘경계해야 할 레즈비언’(Dykes to watch out for)에서 처음 고안된 개념으로, 다음의 세 가지 요건으로 구성된다.


1.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를 최소 2명 포함할 것

2. 서로 이야기를 나눌 것

3. 남성에 대한 것 이외의 다른 대화를 나눌 것


간단해 보이지만 2018년 순 제작비 30억 원 이상의 실사 한국영화 39편 가운데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는 단 10편이었다.* 20%를 조금 넘는 비율이다.

*영화진흥위원회 ‘2018년 한국영화산업 결산’


소개한 웹툰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다양한 것을 욕망하고, 복잡한 고민에 빠져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한 입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권력의 주체가 되길 욕망하고, 세계관 속에서 가장 똑똑하며, 캣 파이트 아닌 갈등의 주인공으로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이 여전히 특별하고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뒷맛이 씁쓸하다.

 

I’m a lion, I’m a queen. 아무도
그래 길들일 수 없어, 사랑도

- (여자)아이들 ‘Lion’ 가사 중에서



*사진| (여자)아이들 ‘LION’ 뮤직비디오, 네이버 웹툰, 카카오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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