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지와 찰리 May 13. 2020

[균형을 찾아서] 저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백수이자 K-장녀의 하루 일과

글 | 미지


“골반이 틀어져 있어서 몸에 균형이 맞질 않네요.” 한 발로 몸의 무게를 버티는 동작을 할 때면 자꾸 넘어지는 내게 요가 선생님이 한 말이다. 요가의 핵심은 몸의 ‘균형’을 잡는 일이다. 균형 잡힌 신체는 올바른 자세와 단단한 코어 근육을 만든다. 모든 일에서 균형이 중요한 이유다. 세상에는 너무 익숙해져 무너진 사실도 모른 체 넘겨버린 일들이 많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균형을 찾아본다. 독일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친할아버지는 9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나 지금의 할머니와 결혼해 슬하에 자식을 셋 낳아 길렀다. 그중 첫째가 바로 나의 아빠다. 열 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장남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한다. 4남매의 막둥이였던 나의 엄마는 아빠의 이러한 가족력을 알고서도 그와 결혼해 나와 남자인 내 동생을 낳았다. 후일담에 따르면 그 당시 엄마에게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을 한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까지 한 집에 함께 살았다. 집안의 수장인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명절만 되면 그의 열 형제와 그들의 배우자 그리고 자식까지 대략 서른 명의 친척들이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명절 풍경은 참으로 단순했다. 가운데 거실을 기준으로 여자들은 부엌에, 남자들은 제사를 지내는 안방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있었다. 친척 중 누군가 입 아프게 따로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집안일을 누가 해야 하는 것인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크레이지 아시안 걸 중 최고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장손 집안 1남 1녀의 장녀로 자라면서 친척들로부터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그중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은 “동생들에게 양보하라”였다. 명절만 되면 몰려오는 친척들은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특히 어린 친척 동생들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장난감과 학용품을 탐냈다.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네가 누나(언니)니까 참아”라고 하며 내 속을 긁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은 동생들에게 참 많은 걸 양보했다. 4학년이 되고 나서는 더 이상 내 물건을 뺏길 수 없어 명절 때마다 아끼는 물건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기는 기지를 발휘했다. 지금 와 고백하는데 빈 손으로 돌아가는 동생들의 뒷모습을 보고 뿌듯한 미소를 지은 적이 많았다.     


그다음으로 많이 들은 말이 “집안일을 보고 배우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부엌에는 발도 안 들이는 남자 어른들이 내게 한 말이다. 엄마를 도와주기 위해 제사상을 치우고 있으면 “장녀라 그런지 집안일을 잘한다”라고 칭찬해주기도 했다. 지금은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피붙이니까 예뻐해줘야지(괴롭히는 거 아님)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엄마는 항상 내 편이었다. 친척 동생들이 가져가는 장난감과 학용품을 직접 뺏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내 물건을 발견하지 못하게 미리 숨기는 걸 도왔다. 친척들 등살에 밀려 전을 부치고 있으면 그만하라는 말 대신 나가서 뛰어놀라고 뒤집개를 대신 잡았다. 그는 장녀와 누나의 역할을 강조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야. 너를 먼저 챙겨야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어”라고 말해주었다.

     

세심하지도 꼼꼼하지도 않은 나, 왜 집안일은 잘하는가

다시 2020년 오늘로 돌아와, 나는 엄마와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현재 이 집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엄마뿐이다. 나는 기타 치는 백수이고, 연년생인 남동생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수험생활을 하고 있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셋 중 집안일을 전적으로 도맡아 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다들 쉽게 정답을 맞혔으리라 생각된다. 정답은 바로 비경제활동인구*인 나다. 성별을 떠나 부모와 자식 관계를 떠나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나 역시 누구의 잔소리도 없는 평화로운 백수 생활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비경제활동인구: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15 이상의 인구. 일할  있는 능력은 있으나 일할 의사가 없거나, 전혀 일할 능력이 없어 노동공급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


요즘 나의 하루는 빨래로 시작해 설거지로 끝난다. 엄마가 준 돈으로 반찬거리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재활용 쓰레기도 버리고 가끔 화장실 청소도 한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온전히 다 내가 하는 건 아니다. 아침과 점심 식사는 내가 준비하고 저녁 식사는 남동생이 책임진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대청소는 둘이 함께 진행한다. 둘 다 엄마 집에 얹혀사는 입장이기 때문에 수험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도 최소한의 몫은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항상 비슷한 문제로 다툼이 발생한다.


“동생아, 저녁 설거지를 하고 왜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지 않았니?”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지.”

“저녁 설거지를 하고 수챗구멍까지 비우는 것이 너의 일인데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니?”

“그 정도는 누나가 해 줄 수 있잖아!”


대략 이런 식의 말다툼인데 물론 글로 옮길 때는 순화와 생략 기법을 사용했다. 동생의 입장은 ‘나는 지금 수험생이니 사소한 것들은 그냥 누나가 해달라’는 것이고, 내 입장은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으니 네가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생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늘 집안일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그의 태도가 나는 탐탁지 않다.


하루는 청소를 끝내고 깨끗해진 화장실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내가 봐도 짧은 시간 안에 구석구석 꼼꼼하게 청소를 마친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나는 청소뿐 아니라 음식도 곧잘 하고 빨래도 구김 없이 잘한다. 곰팡이가 나기도 전에 베란다 청소를 끝냈고 음식물도 냄새가 나기 전에 그때그때 알아서 버린다. 집안일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어색할 정도로 꼼꼼하고 세심하다. 나는 계획적이지도 않고 정리정돈도 잘 안 되는 사람일뿐더러 자취 경력도 없는데 말이다. 반대로 내 동생은 작은 일 하나도 꼼꼼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한다. 고등학생 때 기숙사 생활을 했었고 1년 10개월 동안 군대에서 조직생활을 경험했다. 또 대학생 때는 자취도 했었다. 타고난 성향과 이제까지의 경험을 놓고만 봐도 동생이 나보다 집안일을 훨씬 빠르고 꼼꼼하게 해야 맞다.

점점 집안일의 고수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동생이 손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는다. 맡은 일은 꼭 하려고 하고, 또 시키면 군말 없이 잘한다. 다만 궁금한 것은 나는 왜 이토록 집안일을 잘하게 된 것이고, 집안일을 시키는 사람이 언제부터 내가 됐는지 하는 것이다. 내가 집안일에 타고난 무언가를 갖고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단지 내가 동생보다 1년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인정하긴 싫지만 어려서부터 여자들이 집안일을 하는 걸 줄곧 봐 왔기 때문에?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최근 인터넷을 달군 트위터 글을 보고 있으면 웃음보다는 씁쓸한 감정이 마음을 채운다.

마! 나는 경고했다! (출처 트위터)
작가의 이전글 [타미의 기력회복] 면허의 자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