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뮤지컬의 휴간과 지워지는 것들
글 | 찰리
거리에는 에이즈 환자가 들끓고 도시의 집세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는다. 예술과 철학은 사라져 가고 사람들은 자극으로 가득한 매스 미디어를 더 좋아한다. 인생사 공수래공수거이거늘, 집을 빌려서 살 돈도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빌려준 돈으로 점점 더 부자가 되는 사람도 있다. 시대가 빠르게 변한다. 성장과 발전이라는 화려한 파도가 몰려오면, 올라타는 자와 휩쓸려 사라지는 자가 생긴다.
어떤 사람이 외친다. "나라꼴이, 개판이야!" 대학 강사라는 꽤 멀쩡한 일자리도 있지만, 도심에서는 집세조차 낼 수 없다. 하필 컴퓨터 시대에 철학 강사라니. 소유가 아니라 임대도 어려운 인생이 거리에 차고 넘친다. 그래도 사랑을 하고, 꿈을 노래한다. 지옥 같은 도시의 밖에는 노력한 만큼 돈도 벌고, 철학 대신 와인을 얘기하며 메마른 영혼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과 뜨거운 햇살이 비추는 곳이 혹시 있지 않겠냐면서.
내가 사랑하는 뮤지컬 '렌트'의 넘버 '산타페'(Santa fe) 대목이다. 우주에서 가장 거지 같은 뉴욕을 떠나 산타페에서 레스토랑을 열고 싶다는 철학 강사 톰 콜린스가 부르는 노래다. '렌트'는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원작으로 미국의 뮤지컬 제작자 조나단 라슨이 1996년 발표한 성스루(Sung-Through, 대사가 거의 없이 노래로만 진행하는 뮤지컬) 뮤지컬이다. 푸치니가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젊은 예술가들과 결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렌트는 20세기 말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신진 예술가와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국내에서는 2000년 신시컴퍼니가 작품을 들여와 초연을 했고, 지난 2020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2달간 공연을 했다.
'렌트'를 올리기로 마음먹은 제작진들이 2020년에 약도 없는 역병이 돌고, 집세는 치솟아 제비뽑기로 전세를 구해야 하는 대한민국을 예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슨이 '렌트'를 만들 당시에도 20여 년이 지나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몰랐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 무대에 오른 굵직한 라이선스 뮤지컬 중에서 유독 시기적절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일례로 작품 속 '톰 콜린스'의 "컴퓨터 시대의 철학 강사, 요즘 애들은 TV를 더 선호하지!"라는 대사는,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사회가 일반화되고, 화면 뒤로의 일상을 앞당겼다는 점과 통하지 않는가.
변화의 흐름에서 누군가는 돈을 벌지만, 다른 누군가는 설 곳을 잃는다. 뮤지컬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2020년 대한민국의 '렌트'는 코로나19 상황 악화로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두고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언택트 시대에 잊혀지는 것
내 소비생활에서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티켓값이다. 왓챠, 넷플릭스, 유튜브의 열혈 구독자지만 그래도 아직 극장에 가는 것이 가장 좋다. 영화관도 공연장도, 소극장 대극장 할 것 없이 극장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이십 대 초반에 작은 공연의 오퍼레이터 아르바이트를 잠깐 했는데, 관객이 들어오기 전 장내를 청소하면서 '난 평생 이렇게 살다 죽어도 행복하겠다'라는 꿈결 같은 생각에 빠질 정도였다.
유일한 취미이자 스트레스 해소법이 극장에 가는 것인데, 팬데믹 후 극장은 가장 위험한 장소 중 한 곳이 되었다. 작년 말부터 2020년 영화, 연극, 뮤지컬 라인업을 보면서 행복했던 것도 잠시 많은 작품이 무기한 연기 혹은 취소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최고의 방역은 만나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모두가 당분간 만남을 접고 2020년을 없었던 셈 쳐서 코로나가 종식되는 날 짠! 하고 다시 일상을 재개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삶에는 동영상 플레이어처럼 일시정지 버튼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민을 지키는 방역이 강해질수록 누군가는 설자리가 사라진다.
2020년 창간 20주년을 맞은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올해 12월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 '더뮤지컬'은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미디어 환경이 모바일 플랫폼과 소셜 미디어 중심으로 급변하면서 종이 매체 경쟁력은 전과 달라진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에 더해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재정적 어려움도 가중됐다"며 휴간의 이유를 밝혔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기 구독한 잡지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니, 그것도 변화하는 시장에서의 재정적 문제가 이유라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콘텐츠가 쏟아지는 세상이다. 클릭 몇 번이면 무료로 볼 수 있는 것도 많다. 콘텐츠의 범람에서 전통 매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방송국도 적자다 뭐다 하는 마당에 글 매체는 오죽할까. 모두가 '뉴미디어'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이다. 더뮤지컬의 휴간 소식은 이 안간힘의 연장선처럼 세상에 전해졌다.
‘모 매체’의 기자는 더뮤지컬의 폐간 소식을 듣고 에디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폐간이 아닌 휴간이라 정정하며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내용은 그대로 기사화되어 정식 공지 이전에 해당 매체의 [단독] 보도가 되었고, 이에 따른 에디터의 항의에 '기자가 단독 기사를 욕심내는 게 어째서 잘못한 일'이냐 '기자의 모든 연락은 기사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답한 것은 기사화에 대한 암묵적 동의나 다름없다'는 답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 또한 '뉴미디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봐야 할까. 역시 종이신문을 만들던 ‘모 매체’도 살아남아야 했을 테니까? (*출처, 더뮤지컬 에디터 인스타그램)
종이책이 사라질 거라 믿으세요? 아뇨, 종이책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북리더기가 있다고 해도 종이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시장이 작아진다고 모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빠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지하철에 책과 신문을 읽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지금 지하철에는 책은 몰라도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모두 작고 가벼운 컴퓨터를 손에 하나씩 들고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졌다. 극장은 사라질까? 아마 사라지지 않겠지만, 늘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극장을 채우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게될까?
오십이만 오천 육백분의 귀한 시간들
우리들 눈 앞에 놓인 수많은 날
오십이만 오천 육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로
그 오십이만 오천 육백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말해요 산다는 것을
-렌트 ‘Seasons of love’ 중
코로나19 이후 세상이 얼마나 복잡한 지 새삼 알게 됐다. “그거 좀 안 한다고, 그게 뭐라고, 그게 꼭 필요하냐…” 이때다 싶어 숨겨왔던 혐오를 꺼내기도 한다. 평범·보편이라는 선을 긋고 편리함, 발전, 새로움(new)이라는 말들로 선 밖의 인생을 지우기에는 너무 많은 삶이 사회를 채우고 있다.오늘도 코로나 종식을 염원한다. 역병이 사라진다고 타인에 너그러워지는 세상이 올런지는 확신이 없지만.
사진| 영화 ‘렌트’ 유튜브 캡처, 신시컴퍼니, 위키피디아, 중앙일보 기사, 더뮤지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