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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와 찰리 Nov 19. 2020

[1인칭주인공시점]그해 가을, 홍콩

그냥 그리운 도시

글 | 찰리


2017년 11월 8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난 날이자, 그토록 선망했던 도시에 도착한 날이다. 운이 좋게도 출국 당일 카운터에서 비행기 좌석을 비상구석으로 바꿔줬다. 도망치듯 떠나온 나를 응원해주는 듯해 신이 났다. 혼자라는 두려움은 잠시 희미해졌다. 뭐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이륙하자마자 다리를 쭉 뻗고 핸드폰에 다운받아온 노래를 재생했다. California Dreamin', Quizas Quizas Quizas, 피아졸라의 곡들… 그렇게 난 홍콩에 도착했다.


레슬리가 살던, 양조위가 사는 곳

월급날을 앞두고 가진 돈을 다 털어서(심지어 대학생인 동생한테 10만 원을 빌렸다) 갑작스레 떠난지라 주머니 사정은 좋지 못했다. 때문에 1박에 한화로 1만 2천 원 정도 하는 침사추이의 한 호스텔에서 3박을 했다. 분명히 여성 전용 방을 예약했지만, 그 방을 가기 위해서는 시커먼 남자들이 웃통을 벗고 자는 2층 침대들을 지나쳐야 하는 손바닥만 한 숙소였다. 청킹맨션 근처 침사추이 한복판의 오래된 빌딩 14층에 있던 호스텔은 여러모로 예술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면 무조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갔다 다시 원하는 층까지 올라가야 했고, 성냥갑 같은 샤워 부스는 남녀 구분이 없었고 문이 잠기지도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긴장되면서도 영화 속 여행객이 된 것 같아 괜히 설렜던 것 같다. 아마 그렇게 다시 가라면 못 가겠지만.

작고 소중한 호스텔의 침대. | 찰리

홍콩은 1940년대부터 1997년까지 영국 식민지였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이양했고,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홍콩은 반환 시점 기준 향후 50년간 사회, 경제 면에서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일국양제를 적용키로 했다. 현재 홍콩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의 원인이기도 하다. 여하튼 그래서인지 홍콩은 유럽의 자본주의와 중화권 문화가 묘하게 섞여 나는 특이한 분위기가 있다. 세기말 홍콩영화에 빠져든 이유도 바로 이 분위기 때문이었다. 고정관념 속의 동양 서양 그 어디도 속하지 않는 공중에 떠있는 환상의 공간 같은 느낌이었달까.

침사추이의 청킹맨션. | 찰리

체크인을 해주던 스태프는 듬직한 외모의 '마크'라는 친구였다. 나는 마크의 유창한 영어 안내를 들으면서 뜬금없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한 어떤 얼굴들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토니(양조위)나, 나의 레슬리(장국영) 같은.


=중경삼림(1994)

영화 '중경삼림'을 본 사람은 홍콩에 오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경삼림'은 도심을 배경으로 두 남자의 실연 에피소드가 옴니버스 식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90년대의 홍콩과 임청하, 금성무, 양조위, 왕페이 등 이제는 전설이 된 배우들의 젊은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생일(5월 1일)이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루에 하나씩 사는 경찰 233(금성무), 경찰 663(양조위)을 짝사랑하는 페이(왕페이)가 그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노란 가발을 쓰고 다니는 마약 밀매업자(임청하) 등 지금까지도 유의미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한 평론가는 "훗날 20세기의 마지막 연애 방식에 관해서 말하는 영화라고 기억될 것"이라는 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나에게 ‘중경삼림’은 홍콩, 홍콩영화 그 자체다. 홍콩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이 영화 때문이었고, 여행 중 청킹맨션과 미드레벨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라보고 있어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 찰리, 중경삼림
기억을 조작하는 '마법의 필터'

홍콩에 가기 전, 어릴 때 아빠가 쓰던 펜탁스 똑딱이 필름 카메라를 챙겼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아무거나 찍어도 나름의 감성이 있다.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기울어지면 그 나름대로 멋스럽다. 필름 특유의 노이즈와 누런 색감이 이런 '필름 감성'에 한몫하는 것 같다. 게다가 찍어놓고 바로 확인할 수 없고, 한참을 지나야 볼 수 있기에 기다림이 사진에 덧대져 그 장면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홍콩은 '필름 감성'과 잘 어울리는 도시 같다. 낮에는 노란 햇살이 내리고 밤에는 빨간 조명이 가득하기 때문일까.

양조위가 자주 간다던 국수집. 그가 지나간 자리에 나도 앉았을까. | 찰리

목적 없는 여행이라 발이 닿는 대로 가다 멈춰 서서 어떤 장면을 담아갈지 한참을 고민할 수 있었다. 이 카메라가 홍콩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한 기록을 남기길 바라면서.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현상한 결과물을 보니 '역시 필름!'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1980-90년대라고 한다. 당시 영화 중에서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명작도 있지만, 그때라서 가능한 (한편으로는 유치한) 영화도 많다. 자글자글한 노이즈가 입혀져 다시 올 수 없는 날을 그리고 있다면, 평소 좋아하지 않던 장르의 영화라도 이상하게 가슴에 오래 남았다.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괜히 소중하고 멋진 것처럼 말이다.


=친니친니(1998)

영화 ‘친니친니’는 '첨밀밀'의 미술감독이었던 해중문의 영화 데뷔작이다. "쌍방향의 사랑은 행운이야"라는 말이 떠오르는, 청춘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내성적이고 지나치게 깔끔한 피아노 조율사 첸가후(금성무), 그의 집에 얹혀사는 떠돌이 바람둥이 소설가 유목연(곽부성), 이들의 윗집에 이사 온 괴팍한 피아니스트(?) 목만이(진혜림)의 삼각관계를 그린다. 원제는 '安娜瑪德蓮娜(Anna Magdalena, 안나 막달레나)'인데, 이는 바흐의 두 번째 부인의 이름이자 바흐가 그에게 선물한 소곡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한 편의 교향곡처럼 4악장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가후의 시점에서 목연·만이와의 만남, 그리고 이뤄진 사랑과 이뤄지지 못한 사랑들에 대한 변주로 이어진다.

친니친니

흔한 삼각관계지만 영화는 처절하거나 치열하지 않고 오히려 잔잔하다. 심지어 발랄한 이 영화는 내용은 자꾸 잊어버려도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꺼내보게 된다. 영화 '금지옥엽' 시리즈, '금옥만당'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장국영과 원영의의 특별 에피소드는 덤이다.

사랑하는 장국영. | 친니친니

일생에 단 한 번 고작 사흘 머무른 도시가 이렇게까지 그립다니. 마음이 추웠던 어느 11월, 후텁지근한 도시 한복판에서 난 묵혀있던 상념을 땀방울과 함께 흘려보냈다. 역병의 해도 어느새 겨울을 향해 간다. 홍콩에는 또 언제쯤 갈 수 있을까.

호스텔 친구들에게 받은 편지. 아직까지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엽서는 프로파간다가 작업한 패왕별희 포스터. | 찰리

필름사진 | 찰리

영화스틸 | 중경삼림, 친니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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