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여행자에게 찾아오는 따뜻한 위로
우리가 마주했던 지구의 반대편, 칠레 푼타아레나스의 풍경을 떠올려본다. 날씨가 흐렸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인 시야가 마음을 뻥 뚫어주는 기분이었다. 신랑과 함께 17개국 80개 도시 여행을 했지만, 푼타아레나스는 우리가 처음으로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찾았던 도시다. 왜 숙소 예약 없이 갔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숙소 예약 없이도 충분히 우리 둘이 잘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렇게 찾아갔던 여러 숙소들.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가격이 비싸서 패스했다. 예약이 꽉 차서 패스했다. 문을 닫아서 패스했다. 숙소를 찾아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 그날 우리 부부는 23km를 걸었다. 둘 다 앞으로는 7kg 보조가방, 뒤로는 20kg 여행 배낭, 그리고 우쿨렐레를 들고 걸었다. 지나가던 고양이도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한참을 우리 곁을 맴돌았다.
숙소를 찾아 걷고 또 걷고, 계속 걸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옆에 차가 한 대 와서 섰다. 현지인 같았는데, 우리를 보며 “아까 지나가다가 봤는데, 지금 또 보게 돼서 차를 세웠어. 숙소를 구하고 있니?”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 어리둥절한 우리는 “숙소를 구하고 있난 중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 “내가 숙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마침 내일부터 리모델링이라 지금 숙소가 비어있는 상태야. 숙소 컨디션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싸게 해 줄게. 가볼래?” 와, 놀라웠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그렇게 주소를 받아 들고 찾아간 숙소, 무섭기도 했지만 이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가게 된 숙소는 장기 투숙자들만 남아있는 숙소였다. 우리가 함께 쓸 수 있는 방은 허름한 6인실 혼성 도미토리 룸. 다행히 신랑과 나는 같은 침대였다. 함께 방을 쓰게 된 이들은, 정말 누가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장기 투숙자들이었고, 모두 남자들이었다. 괜히 무섭고 두려웠다. 겁이 많은 내가 무서워하는 것 같아 보이자, 신랑이 차분히 날 달래주었던 생각이 난다. 숙소를 찾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진 탓에, 첫날은 짐을 풀고 근처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서 파스타를 해 먹었다. 무거운 가방과 함께 23km를 걸었으니 피곤할 만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화장실이 열악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푼타아레나스를 잠깐 둘러보기로 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 중 잠시 들른 푼타아레나스는 정말 지구 반대편이었다. 우리가 세계여행을 와있다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진 순간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종영한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아는가?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 다양한 에피소드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그중 사연을 받아 무한도전 멤버들이 대신 사연을 전달해주는 ‘배달의 무도’ 특집이 방영되었다. 박명수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푼타아레나스의 라면집을 찾아가는 사연이 소개되었다. 당시 무한도전을 볼 때 ‘지구 반대편에서 한국인이 끓여주는 라면을 먹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도 꼭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옅어졌던 기억은 신랑과 함께 세계여행을 하며 지구 반대편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다시 생각이 났다. 여행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 블로그를 참 많이 찾아봤다. 그리고 “칠레에 가면 무한도전에 나왔던 라면집이 있대!!”라는 여행 블로그의 글도 참 많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푼타아레나스 땅을 밟은 우리 부부가 그 라면집을 가보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먹는 라면은 물이 많아도, 물이 적어도 꿀맛이다. 푼타아레나스에서의 하루가 굉장히 힘들었기에 이곳에서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라면집이 너무 반가웠다. 괜히 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니까. 단기간 여행을 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우리는 1년 6개월가량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생활했다. 마트에서 라면을 사서 끓여먹을 수도 있지만, 늘 공용숙소를 사용하며 라면을 끓여먹는다는 건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물을 끓여 라면수프를 넣는 순간, 공용 주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기침을 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라면집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tv 프로그램에 나왔던 사장님을 직접 만나니 더 신기했다. 가게에 들어서니 이미 다녀간 많은 사람들의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사장님 뒤로 쌓여있는 라면을 보니 기분이 좋다 못해 황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여기에선, 라면수프를 넣는다고 기침을 하는 사람도, 라면을 끓이기 위해 눈치 봐야 하는 일도 없었다. 긴 여행에 지쳐있는 우리에게 한국인의 정을 느끼게 해주는 김밥과 라면 그리고 사장님만 있었을 뿐이다. 왜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부부가 함께 여행을 하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끓여주신 라면과 김밥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지구의 반대편,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먹은 라면. 그것도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그곳에서 먹은 라면은 정말 꿀맛이었다.
여행지에서 먹는 라면은 참 특별한 추억이 된다. 한국에서 지겹도록 먹은 라면이었지만, 그 라면이 지친 여행자들에게 주는 이유 모를 따뜻함은 오랜 기간 여행하는 여행자들에게 참 따뜻한 기억이 된다. 어쩌면 그래서 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숙소를 찾기 위해 하염없이 걷기만 했던 23km.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듯, 그날 꼬불거리던 라면은 어느덧 우리 부부의 진한 추억이 되었다. 그날 먹은 라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