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라의 전성기 3

골목안에서 벌어지는 퀴라의 삶

by 소소예찬

4

“현주야?”

“응 순남이 언니”

“이따 학교 끝나고 골목 끝에서 고무줄놀이할 건데 나와”

“응 알았어”

순남이와 퀴라는 학교 쉬는 시간 우연히 만나게 되면 늘 고무줄놀이가 숙제인 듯 약속을 한다. 순남이는 윤석과 13살 동갑내기로 윤석의 집 골목 왼쪽 편으로 붙어있는 첫 번째 집에 위치해 있는 곳에 살고 있었다.

시멘트벽돌로 지어진 커다란 집. 그 집만이 이상하게 그 골목 안 유일하게 양철대문이 없었다.

시멘트담벼락 사이로 들어가면 가운데 우물가 주변으로 둥그렇게 둘러 쌓인 방앞 빨랫줄에 빨래들이 펄럭이며 서로 간의 보금자리인 양 경계의 금을 긋고 있었다.

그 빨랫줄 위에는 색색깔의 이불, 옷등이 널려져 있었고 그 뒤로 살짝 보이는 작은 네모 모양들의 미닫이 방문들이 여러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방문옆이 부엌인 듯 석유곤로가 보였다.

한가족이 이렇게 방하나에 부엌하나를 가진 듯 세트로 놓여 있었고 그 집 앞 빨랫줄 위 빨래들이 “내 집이야”라며 이야기해 주는 듯 했다.

순남이네도 그방들과 부엌이 세트인 집에서 살고 있었다. 물론 퀴라는 그 집 앞 빨래에서 순남이가 즐겨 입었던 체크남방을 볼 수 있었기에 쉽게 순남이네 집인 것을 알아챌 수가 있었다.

퀴라는 학교 가는 길이 심심할 때면 순남이네 집에 들러 순남이랑 같이 학교를 갔다.

“순남이 언니? 순남이 언니? 학교 가자~”

“현주구나! 들어와 순남이 지금 밥 먹는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우리 순남이랑 같이 학교 가”

“네”

순남이를 부르는 소리에 부엌에 계시던 순남이 어머니가 퀴라를 반겨주셨다.

순남이네는 몇 해 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순남이네 어머니가 밭일, 공장일 하시며 가족의 생계를 이어 나가셔야만 했다. 출근을 하시기 위해 그리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순남이 어머니도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아침밥 차리시고 출근준비를 하신다. 퀴라도 우체국 배달일 하시는 아버지가 일찍 출근하셨기에 아버지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일찍 학교에 가야만 했다. 둥그런 밥상에서 순남이네 가족인 순남이 어머니, 순남이의 언니, 순남이 남동생, 그리고 순남이가 밥을 먹는다.

좁은 밥상을 둘러싸고 앉아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퀴라는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퀴라가 학교에서 끝나고 오면 엄마는 집에 자주 안 계셨다. 미제화장품장사를 하실 때에는 장사하시느라 늘 안 계셨고 이제는 세월을 탓하시며 무언가를 하신다며 종종 집을 비우셨다. 퀴라도 빈집에 혼자 있기 싫어 종종 골목길안을 어슬렁거리며 돌멩이 하나조차 반가운냥 인사를 해댔다. 좁은 골목길안을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다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소리에 퀴라는 발길을 옮겨본다.

“여기서 나오는 소리 같은데...”

길쭉한 디귿자 모양의 골목길 안에서 퀴라네집 맞은편 집으로 연기네 집에서 가까운 곳에 묵직한 나무대문집. 그 나무문틈 사이로 흥미로운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귀라는 음악소리가 새어 나오는 문을 살짝 열어 엿보려 하는 순간 퀴라의 동생이 문을 열고 나왔다.

“누나? 나 여기 있는 것 어떻게 알았어?”

“대성아? 너 여기 왜 있니? 엄마는 어디 계셔?”

“여기”

동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가끔 보았던 부잣집아줌마 – 새하얀 얼굴, 목, 팔뚝에 토실토실 살이 많았고 검은 머리카락에 반짝이는 보석 머리띠를 두르고 늘 예쁜 하얀색 홈드레스를 입고 양산을 쓰고 가끔 어디론가 외출하셨던 모습의 아줌마집이었다. 그 당시 그 골목길안에서 그래도 살만하다 싶은 집은 군인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었기에 그 큰 나무대문 부잣집도 그 당시 계급이 높은 듯한 군인가족 집이었다.

“대성아? 엄마 여기서 뭐 해?”

“엄마.... 어떤 아저씨랑 꼭 껴안고 춤추는데, 이거 비밀 이래”

“춤춘다고? 왜?”

“몰라, 그냥 춤추는데 어떤 아저씨 손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퀴라는 동생의 말을 듣고는 무척 궁금해져서 음악소리가 나는 방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음악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안의 문틈으로 사람들이 살짝 보였다. 그 사람들 속에 엄마가 왜 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며 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비밀이라는 동생의 말에 그냥 동생과 놀면서 엄마가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퀴라는 동생의 자전거도 밀어주며 함께 놀아주었다. 퀴라의 동생은 퀴라보다 4살 아래였다.

퀴라의 어머니는 군입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퀴라의 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했고 퀴라를 임신했다. 그래서 퀴라의 아버지는 퀴라가 태동하며 엄마의 뱃속에서 노는 모습, 태교조차 듣지 못했으며 퀴라가 태어나는 모습조차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퀴라아버지가 군제대하고부터는 이상하게도 퀴라의 어머니는 임신이 되지 않았다. 그 후 아들 선호사이 꽉 박혀 있었던 퀴라의 아버지의 성화에 퀴라의 어머니는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가 약을 지어 드시기도 하고 민간요법을 시도해 보기도 하셨다.

그렇게 4년이 흘렀을 무렵, 퀴라의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퀴라가 태어난 지 4년 만에 퀴라의 동생이 태어났다. 그렇게 바라던 아들. 모든 사람들이 축하하며 귀한 아들이라고 칭했기에 퀴라도 남동생이 귀하다는 생각을 하며 늘 돌봐주고 양보하는 입장이 되어갔다.

그렇게 동생과 놀아 주는 동안 얼마가 지났을까 음악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방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은 하나둘 줄이어 차례차례 나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깔깔깔 웃는 소리에 “오늘 신났어요, 너무 즐거웠어요. 언제 또 오시죠?” 라며 아줌마들이 앞다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주는 제가 교육을 가서요 못 오고요, 다다음주에 올게요”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다다음주에 또 다들 우리 집으로 오세요”

라며 부잣집 주인아주머니가 손짓을 하며 나오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번지르한 빛이 도는 마술사 양복을 차려입은 아저씨가 나왔다. 그리고 그 뒤에 퀴라의 어머니가 환한 미소를 띠며 나오고 계셨다.

“엄마?”

“어...너 여기 어떻게 알고 왔니?”

“응 엄마 찾다가 대성이가 보여서...”

“어서 가자!”

퀴라의 어머니는 당황한 듯 퀴라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며 부잣집 대문을 열고 황급히 나오셨다.

“현주야? 엄마 여기 왔다고 아빠한테 말하지 마 알았지?”

“왜?”

“엄마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알았지? 비밀 지켜!”

“응”

퀴라는 아빠에게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엄마가 이상했다. 왜 말하지 말라고 할까? 퀴라는 엄마의 말씀이 이상했지만 비밀이라는 말에 조금 설레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고 빈집에 가방을 던져두는 일, 온 가족이 함께 다정히 식사를 같이 해본 적 없는 식사시간들, 그리고 엄마의 비밀, 퀴라가 보기에 무언가 일이 터지기 직전 전야제 같은 날들, 하루하루 퀴라의 온몸 위 작은 솜털까지 자극할 만큼 보이지 않는 그 무엇들이 살며시 다가오고 있는 듯 했다.

퀴라는 그런 엄마의 모습, 싸늘한 집을 생각하니 순남이네 가족이 너무도 부러웠다.


“오래 기다렸지? 우리는 늘 아침마다 바빠 화장실도 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세수할 때도 그렇고, 우리 집은 그래서 힘들어 ”

“아니, 난 언니가 부러워 가족도 많고 아침도 다 같이 먹고...”

“호호호호 호호호호 뭐가 부럽니? 난 현주 네가 더 부럽다. 외동딸이라고 옷도 이쁘게 입혀주시고 아버지도 계시고....”

순남이는 퀴라를 지그시 바라보던 눈빛에서 그리움이라는 방울들이 고이고 있었다.

퀴라는 순남이랑 등교하는 시간은 너무도 흥미로웠기에 학교 가는 거리가 너무도 짧게 느껴졌다. 퀴라는 그렇게 종종 순남이네 집에 들러 학교를 간다.

“아참, 오늘 학교 끝나고 우리 고무줄놀이 하는 거 알지?”

“응 알았어, 이따 만나 언니”

“그래 공부 열심히 하고 이따 봐”
“응”

순남이와 퀴라는 짧은 등굣길을 마치고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시작종이 울리고 퀴라도 앞자리 민석이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멈춰진 자세로 앉아있었다.

뚫어져라 민석을 바라보던 그 순간 퀴라는 “돌아봐라 얍! 뒤돌아봐라 얍!” 라며 주문을 외웠지만 민석은 선생님 말씀에 두 귀만 쫑긋 움직일 뿐 퀴라가 있는 뒷자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3교시가 끝났을 무렵,

“현주야? 너 동생 있어? 헉 헉 헉”

바로 뒷자리 은숙이가 화장실을 다녀오다 헉헉거리며 퀴라에게 말을 건넸다.

“응 있지, 왜?”

“네 동생 머리 노랗고 눈 크고, 맞아?”

“응, 그런데?”

“네 동생 맞는구나! 화장실. 화장실 가봐 거기 서있어 ”

“뭐라고? 내 동생이? 설마”

은숙이의 말을 듣기도 전에 쿼라는 정신없이 뛰어나갔다. 그리고 정말로 화장실 안에서 여러 명이 줄을 서있는 그 화장실 안에 동생도 줄을 서고 있었다.

“야? 너 여기 왜 왔어?”

“누나?”

“너 혼자 온 거야?”

“응”

“얼른 집에 가 여기 오면 안 돼! 누나 아직 학교 안 끝났어”

“언제 끝나는데?”

“아직 한 시간 더해야 해”

“그럼 내가 기다릴게”

“그렇게 오랫동안 뭐 하고 기다려?”

“저기 그네 타고...”

그러는 사이에 수업종이 울렸다.

“안 되겠다 누나 들어갈 테니 네 맘대로 해”

퀴라는 화가 나서 교실로 들어왔지만 수업시간 내내 동생이 걱정되어 시선은 창밖으로 향해있었다.

퀴라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가장 먼저 일어나 동생을 찾으러 나갔다.

동생은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며 그네도 타고 운동장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혼자 잘 놀고 있었다.

“대성아? 이제 다 끝나고 담임선생님 말씀 듣고 집에 가면 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응”

퀴라는 다시 교실로 들어갔다가 종례를 마치고 책가방을 메고 나왔다.

“엄마는?”

“거기 갔어”

“어디? 거기? 또?”

“엄마가 아줌마네 영식이 자전거 타고 놀고 있으라고 했는데 영식이가 뺏어갔어, 그래서 나 화가 나서 그냥 나왔어”

“그러다 길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앞으로 그러지 마 알았지?”

“응 알았어”

아직 어린 동생을 가여워하며 집으로 가는 길에 동생에게 쫀득이를 사주었다.

“맛있지?”
“응 너무 맛있어 누나”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니? 킁킁킁” 퀴라는 더러운 냄새와 이상한 냄새가 자꾸만 따라오는 듯 해 여기저기 냄새를 맡아보았다.

“누나? 나는 냄새 안 나는데... 그냥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퀴라의 동생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하다가 누나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쳐다보며 잘못을 저지른 듯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다며 말을 했다.

“어... 이 냄새.... 너~ 쌌어?”

“음.... 배가 아파서 조금 아주 조금만”

“화장실 가지 왜 참고 싸니?”

“무서워서”

퀴라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퀴라도 학교 화장실을 갈 때마다 변기 속 아래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던 곳. 학교 화장실은 구멍이 뚫린 화장실 변기였기에 발조차 디디기 무서워서 참다가 종종 소변을 지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퀴라가 집에 오면 퀴라의 어머니는 퀴라의 몸에서 지린내가 난다며 목욕을 시켜주셨다.

퀴라는 잠시 고민에 빠져 있다가 얼른 양동이에 물을 받아 엄마가 해주시던 것처럼 동생의 몸을 씻겨주었다.

“이제 됐다. 냄새 안 난다.”

“응... 냄새 이제 안나네 이히히히”

“히히히히 이히히히”

그러는 사이에 퀴라어머니가 오셨다.

“엄마?”
“대성이 집에 와 있었어? 엄마가 한참 찾았잖아”

“엄마? 글쎄 얘가 학교에 왔었어”

퀴라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해 주고 엄마 탓이라며 화를 내고 싶었지만 갑자기 떠오른 순남이 언니와의 약속 - 고무줄놀이를 하러 가야 하기에 입을 닫아버렸다.

“아참 순남이 언니가 고무줄놀이 하러 오랬는데, 저 놀다 올게요”

“그래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말고 일찍 와서 숙제도 해”

“네”

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네” 라는 말만 건성건성 던져놓고 순남이 언니를 만나기 위해 골목으로 내달렸다.

“언니? 나 왔어”

“일찍 좀 오지, 너 기다리느라 편도 못 갈랐잖아”

“미안해 언니, 동생 씻기다가 그만...”

미안한 마음에 퀴라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너랑 나랑 같은 편이야 재순이랑 영숙이가 같은 편이고, 우리 먼저 하자”

“응”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

검정 긴 고무줄의 한쪽은- 윤석의 집 양철대문 오른쪽 옆에 내 터인 양 언제나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전봇대. 그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영숙이 손에 잡혀 있었다.

그 전봇대 위의 전깃줄에는 제비들도 신나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듯 재잘대고 있었다.

그 제비들은 그렇게 고무줄놀이 하는 골목길안 아이들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은 주둥이로 열심히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다른 검정 고무줄 한쪽은 재순이의 손에 잡혀 있었다. 퀴라와 순남이 둘만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영숙이 대신 전봇대에 고무줄을 매어 놓고 고무줄놀이를 하고는 했었다.

영숙이와 재순이도 골목 안 퀴라네집 맞은편에 위치한 집에 나란히 살고 있었다. 그리고 순남이와 동갑내기였다. 퀴라는 9살 숫자상 나이만으로는 어렸지만 퀴라는 결코 13살 언니들보다 더 많이 어리다고 느끼지 않았다. 숫자가 나이가 아니란 것, 생각이란 것이 생기고 나서 퀴라는 나이를 종종 잊고 지내며 언니 오빠들과 나란히 인생을 견주고 있었다.

퀴라가 언니들과 땀을 내며 열심히 고무줄놀이를 하는 동안 윤석과 동네친구들이 학교에서 오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놀이라도 하고 온 듯 앞머리는 땀에 젖어 반지르르했다.

마치 아버지가 지인의 결혼식날 양복을 차려입으시고 머리에 반지르하게 머릿기름을 바르셨던 그 모습 - 하이칼라를 했고, 목덜미에는 때국물이 질질 흘러 꽉 조여맨 목걸이라도 한 듯 시꺼먼 띠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긴바지를 입고 있었던 다리에는 어느새 반바지가 되어 허리춤 바지는 벗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윤석은 새까만 머리칼에 하얀 얼굴 아침 그대로인 듯 깔끔했고 그리고 옷매무시도 아침 등교할 때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세수를 한 듯 앞머리카락이 조금 젖어있었고 양쪽 볼 아래로 흐르는 물기가 마치 새벽아침 풀잎에 살포시 내려앉은 촉촉한 이슬처럼 보였다.

땀이었을까 물이었을까 퀴라에게는 금방 세수를 한듯한 윤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주위 남자아이들은 퀴라의 시선 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뒤 남자아이들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여자아이들이 놀고 있던 검정고무줄을 끊어버렸다.

순간 네 명의 여자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희들 가만 안 둔다. 거기서 ”

여기저기 쫓고 쫓기는 닭과 강아지처럼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 두 무리가 되어 골목길안을 지나 어느새 논밭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윤석의 집과 순남이의 집 담벼락사이로 한 사람정도 지나다닐 정도의 틈이 있었다. 담벼락 부실공사였을까! 아니면 논밭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한 틈이었을까!.

퀴라와 그 골목 안 아이들은 담벼락 사이 틈을 더 잘 볼 수 있었고 또 그곳을 지나다닐 수 있는 특권 - 아무에게나 보이지 않는 틈, 어리고 순수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틈이라 생각했다.

보이는 자에게만 보이는 그런 현실 속의 환상적인 그 틈을 빠져나가면 시멘트바닥만이 보이는 골목안과는 전혀 다른 세상 - 시원하고 뻥 뚫린 넓은 들판에 언제나 땅따먹기 할 수 있는 곳이 나왔고 조금 더 나가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기차들만의 세상인 기찻길이 나왔다.

“너희들 붙잡히면 정말 큰일 난다.”

“메롱 따라와 봐라”

남자아이들을 따라간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던 여자아이들, 하지만 남자아이들은 냅다 뛰다가 너무 멀어질라치면 조금씩 천천히 걷다 그렇게 간간히 잡혀주었다.

“미안 미안해, 내가 고무줄 사줄게”

“나빠! 너 맞아야 해”

순남이, 재순이, 영숙이는 남자아이들을 붙잡아 여기저기 때렸다.

아니 퀴라의 눈에는 그냥 때리는 시늉만 하는 듯해 보였다. 그 틈 사이로 지켜보며 퀴라는 끊어진 고무줄을 다시 이으며 쫓고 쫓기는 언니오빠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다보며, 퀴라도 내달리며 오빠들의 커다란 등짝을 어루만지고 싶은 듯 퀴라의 심장이 마구마구 요동쳐 왔다. 하지만 학교가 끝난 후 퀴라를 따라오며 퀴라의 걷는 모습과 씰룩거리는 엉덩이가 우습다며 놀려대던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생각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무렵 숨을 몰아치며 다가오는 윤석이 보였다.

“퀴라야? 헉 헉, 이따 9시에... 알지?”

헐레벌떡 헉헉거리며 나타난 윤석이 작은 목소리로, 해맑은 눈빛으로 아름다운 미소로 퀴라에게 말을 건네며 커다란 양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간 윤석의 집 양철대문이 삐익~ 열렸다 닫히는 순간 윤석의 집안이 빠끔히 보였다.

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주변에 똑같이 지어진 다락방이 있는 삼각형 양옥집. 그 집 앞에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은 회색빛 시멘트가 아닌 햇빛과 아름다운 꽃들의 놀이터인 금빛의 흙 마당이었다.

그리고 그 마당 한쪽에는 빨간 샐비어꽃이 피어 있었다.

녹색대문이 열렸다가 윤석이 들어간 다음 양철대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퀴라에게는 꽤나 긴 시각으로 남아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퀴라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대문은 스르르르 스르르 아주 천천히 닫히고 있었다. 마당 한쪽의 샐비어꽃을 본 퀴라는 순간 윤석이 샐비어꽃을 따서 맛있게 쪽쪽 빨아먹을 것 같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학교 정문옆 화단에 심어져 있는 샐비어꽃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 퀴라는 샐비어꽃 속의 붉게 핀 꽃잎 중에서 길게 나온 것을 따서 꽃잎의 뒤 하얀 부분을 입에 대고 빨면 달콤함이 온몸에 전해지는 듯, 그것이 학교정문에서의 행복이란 것이 온전히 윤석에게서도 느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샐비어의 전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

연인이 큰 샐비어 나무 밑에서 사랑을 속삭이다가 잎을 따며 말했다.

" 이 잎으로 치아를 닦으면 치아가 깨끗해진 다오. "

샐비어 잎으로 이빨을 문지를 청년은 정신을 잃더니 이내 죽어 버렸고 사람들은 그녀가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너무나 억울해 자신도 청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 앞에서 잎을 따 이빨을 문질러 죽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나무를 뽑아 보았다. 알고 보니 두꺼비가 내뿜은 독으로 그들은 죽은 것이었다.

그때부터 잎을 따서 이를 닦는 풍습이 생겼고 연인들은 샐비어 꽃빛과 같은 선홍색의 정열적인 사랑을 원하며, 샐비어 나무 같은 달콤한 보금자리를 원하는 것이다.

-샐비어꽃의 전설-

詩 이효녕


한 여름

무더위보다 더 뜨겁게 불타는 골목

샐비어꽃이 외등대신 등불을 켜면

바람도 멀리 떠났는데

세상은 슬픔의 바다로 파도가 인다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던

연인들이 죽어간 그 자리

다시 사랑으로 피어난 샐비어꽃의 전설

내 가슴을 흐른 뒤 고개를 들어

붉어진 거리를 떠돈다


홍등가의 불빛 속에 앉아있는

우리의 누이들이 피어낸 샐비어꽃

꿈 잃은 슬픔으로 골목에 날아들어

무슨 사랑을 이야기하는가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나누던

슬픈 사랑의 이별도 아닌데

샐비어꽃이 피어난 지금이

그 이별보다 더 슬픈 것은

약속을 지어버린 눈물 때문인가

샐비어꽃이 피어나는 가슴 위로

그대의 마음은 무슨 사랑으로 남아

오늘밤도 거리로 떠도는 것일까

내 슬픈 누이들이여

(네이버 지식 참고)


아름다운 사랑을 전하는 샐비어꽃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붉은 샐비어가 되고 싶었던 퀴라. 그 사이 윤석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 따뜻한 여운마저도 “안녕” 이라고 퀴라에게 인사를 하는 듯 다정다감했다.

남자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 간 후 고무줄은 다시 이어졌고 여자아이들이 잠시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재미없어질 무렵 다들 고무줄을 말아서 영숙이, 재숙이가 들고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들어갔다. 퀴라도 집으로 들어가 윤석의 말에 따라 9시만 되기를 기다리며 방바닥에 엎드려 동화책을 읽었다.

“백설공주“ 엄마가 전집으로 사주신 동화책들이 엄마의 장롱 속 이곳저곳에 넣어져 숨겨지듯 놓여 있었다.

책꽂이가 없었던 퀴라는 처음으로 갖게 된 동화책을 마치 보물처럼 여기며 엄마의 보물 창고 같은 장롱 안이 적당할 것 같아 퀴라의 보물인 동화책들을 그곳에 놓아두고 한 권 한 권씩 엄마에게 꺼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퀴라에게 비싼 동화책을 전집으로 사준 것이 못마땅한 퀴라의 아버지는 동화책만 보면 화를 내시기 때문에 퀴라의 아버지가 계실 때면 퀴라의 어머니는 쉽사리 꺼낼 수가 없었다.

“계집아이가 배 쭉 깔고 뭐 하니? 어서 일어나”

그날도 퀴라의 아버지는 술냄새 풀풀 날리며 들어오셔서는 퀴라가 귀찮다며 방 한구석으로 쫓아버리고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워버리셨다.

퀴라아버지의 양말은 작은 발 뒤꿈치 자리가 발목에 올라가 있었고 바지는 배 위에 걸쳐져 있었으며 코는 딸기에 검은 씨가 더 크게 박혀 있는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에이 때리치든지 해야지... 더러워서 못 다니겠네”

취기에 혼잣말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퀴라는 엄마가 계시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또 술 드셨나 봐!”

“그려, 너희 아버지가 술먹는거 아니면 뭐 하는 게 있겠냐? 그냥 자빠져 자게 내버려두어! 앗 뜨거워!”

퀴라는 연탄불을 갈려하다 연탄집게를 잘못 잡아 데인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엄마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날밤도 더 큰 소리 오가기 전에 대충 저녁을 먹고 난 후 퀴라의 가족은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방이라 해야 퀴라 엄마의 장롱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옷들, 그리고 어디서 얻어 온 것 같은 부피만 커다랗고 오래전에 고장 난 티브이가 떡하니 놓여 있었으니 퀴라의 부모님과 퀴라, 그리고 동생이 함께 잠을 자는 방안 잠자리는 비좁았다. 퀴라아버지의 지독한 술냄새에 코를 막고 누워 있어야 하는 퀴라는 늘 아빠의 옆에서 자야만 했다. 엄마도 동생도 술냄새 풀풀 나는 퀴라아버지의 옆을 싫어했기에 늘 퀴라의 잠자리는 술 취한 퀴라아버지의 발 옆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퀴라 아버지의 잠꼬대에 한 대 얻어맞기도 하고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지독한 가스에 미쳐 버릴 정도로 힘든 밤이 여러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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