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라의 전학 & 편지
12
“미자야? 우리 매점 가자”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퀴라는 미자에게 다가가 매점에 가자고 했다.
“그래. 나는 오늘 노을빵 사 먹을래”
“그래? 나는 슈크림빵 먹을래”
1교시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달려 식당 한쪽에 자리 잡은 매점에서 줄을 선다.
어느새 2, 3학년 언니들이 과자, 음료, 빵등을 차례로 사며 줄을 서고 있었고 잠시후 줄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 윤리선생님 얼굴이 꼭 이 노을빵 같지 않니? 네모난 얼굴에 여기저기 곰보 같은 흉터에 하하하하”
미자는 누가 들을까 싶어 귓속말로 퀴라에게 소곤소곤 대며 말을 했다.
“그래 맞다, 정말 노을빵 같다. 어쩜 미자는 그렇게 표현력도 좋으니? 호호호호”
퀴라와 미자는 빵을 맛있게 먹고 나서 후다닥 교실로 뛰어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2교시는 영어시간이었다.
“1-3반? 영어시간 재미있죠? 그럼 우리같이 본문 한번 읽어봅시다”
“네!”
선생님이 한번 읽고 학생들이 따라 읽는 방법으로 교과서 본문을 공부하고 있을 무렵 퀴라는 넋이 나간 듯 두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고 손바닥으로 교과서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얼굴이 가려지도록 만들어놓은 퀴라의 모습 - 멍한 눈동자를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듯 생각에 잠겼다.
“윤석오빠 지금쯤 대학생일 텐데... 대학교 2학년일까? 연락 한 번 해볼까?”
초등학교 때 시골로 전학 온 이후 새로운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친구들과 지내다 보니 윤석을 잊은 듯 살아왔던 지난날, 편지도 보낼 생각조차 없었던 퀴라는 갑자기 윤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서 오빠가 주소를 적어준 그 쪽지를 찾아보자! 분명히 내가 잘 두었을 거야”
그렇게 퀴라의 머릿속은 집에 가서 윤석이 전해준 주소 쪽지를 찾아볼 생각에 영어 선생님의 목소리는 “윙윙윙 윙윙윙”벌들의 합창소리만이 들려왔고 전혀 영어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영어시간 내내 윤석과의 추억을 생각하며 영어선생님의 영어발음조차도 윤석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변해갈 무렵 - 퀴라는 편지를 써볼 생각으로 흐뭇해하며 멍하니 눈을 뜨고 바라보던 그 순간,
영어 교과서가 갑자기 무언가에 의해 살포시 내려졌다.
퀴라는 멈칫하다 얼굴을 올려다보니 퀴라의 교과서를 슬며시 내려놓은 사람은 바로 영어선생님이셨다.
그리고 영어선생님은 퀴라의 손을 잡고는 계속 본문 속 영어를 읽어갔다.
퀴라는 순간 당황해하며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 영어선생님에게 꾸중을 들을까 걱정하며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자며 손이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열심히 따라 읽었다.
잠시 후 선생님은 손을 살며시 놓고는 퀴라에게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짓고 교탁을 향해 되돌아가셨다.
“어머, 내 마음을 들킨 건가?”순간 아차 싶어 퀴라는 남은 시간만이라도 열심히 공부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영어시간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퀴라는 죄송한 마음과 쑥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마치 급한 일이 있는 척 미자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미자야? 나 고민이 있어”
“고민? 뭔데? 집안일이야?”
“아니, 나 여기 전학 오기 전에 살았던 곳에서 어떤 오빠가 무진장 잘해줬었거든, 그때는 몰랐었어, 그런데 지나고 보니 오빠가 나한테 너무도 잘해준 거였어”
“그래?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잖아~ 근데 연락 왔어?”
“아니, 연락처를 적어 주긴 했는데...못했어”
“바보! 그럼 지금이라도 해봐”
“그럴까? 그런데...”
“왜? 무슨 문제 있어?”
“아.... 니”
퀴라는 순간 두려웠다. 윤석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보고 싶었지만 자꾸만 그때 그 일이 떠올라 머뭇거렸다.
그일.... 초등학교시절 앞집 아저씨로 인한 성폭행이 퀴라에게는 그저 별일 아닌 듯 지나쳐버렸으나 사춘기가 되면서 퀴라는 성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 아저씨가 죽도록 미워졌었다.
그런데 윤석이 그 일을 알고 있고, 더 큰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퀴라는 윤석에게 먼저 연락하기가 두려웠다.
“말해봐! 무슨 일인데... ”
“음.... 사실은 말이야....”
퀴라는 그때는 전혀 몰랐던 일 - 수치스러웠던 그 일들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미자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퀴라는 잊고 싶은 일들이지만 한 해 한 해 모든 것들이 짙게 무르익을수록 퀴라의 머릿속도 깊고 짙게 더욱더 생생하게 떠오르고 점점 더 자주 생각이 났다.
“어머, 너도 그런 일이... 에이, 그건 큰일이 아니야, 그리고 그 오빠는 다 잊었을 거야, 그냥 한번 연락해봐! 그 오빠가 너한테 연락하라고 연락처도 줬는데 연락 안 하는 게 더 이상하다.”
“그런가?”
퀴라는 미자의 말에 편지를 써보겠다는 자신감이 생겨났고, 야자시간 내내 어떻게 편지를 써볼까! 윤석오빠의 그 하얀 얼굴이 그 시꺼먼 머리카락이 그대로일까!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야자시간이 끝나고 밤늦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퀴라는 그 쪽지를 찾기 위해 집안 곳곳을 열심히 찾았다. 창고방 엄마의 장롱 속, 지금은 새로 산 장롱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으니 오래된 장롱은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추억처럼 창고방 한구석에 서글픈 듯 놓여 있었다.
그 속에서 역시나 퀴라의 어릴 적 보물상자는 추억과 함께 세월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잠시 보물상자에 대한 추억을 생각하며 퀴라는 학교에서 미자가 해준 말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보물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너덜너덜해진 백설공주 동화책장 속에서 윤석이 건네준 쪽지가 8년이 흐른 세월에도 아랑곳없이 윤석의 모습을 닮아있는 듯 깨끗하게 잘 재워져 있었다.
퀴라는 미리 사두었던 예쁜 장미꽃무늬의 편지지를 꺼내놓고 잠시 한숨을 쉬고 난 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쓰기 시작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저 기억나시나요?”
이렇게 몇 번을 인사말을 쓰다 지우고 또 쓰다 고친 글이,
“오빠? 잘 지내죠? 저 퀴라예요! 너무 늦게 연락을 해서 이 편지가 오빠에게 잘 전해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연락해보고 싶었어요. 저에게 어릴 적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준 오빠에게 감사하고, 그리고 지금 오빠가 어떻게 변했는지, 또 어떤 학교에서 공부하는지 궁금해졌어요. 그때 같이 놀았던 모든 사람들의 안부도 궁금하고.... 그럼 오빠 답장 기다리며 이만 줄일게요! 퀴라 올림”
혹시나 윤석에게 전해지지 못할까 봐 짧게 적었다. 그동안 8년이란 세월 동안 윤석이 이사를 갔을지도, 아니면 다른 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면 이 편지는 윤석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결국 누군가가 볼 것 같아 많은 내용은 담지 않았다.
그날밤 퀴라는 편지를 넣어둔 책가방을 옆에 두고 잠을 잤다. 하지만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뻐꾹뻐꾹~~ 퀴라야? 퀴라야~~”
“칙칙폭폭 칙칙폭폭 기찻길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퀴라의 두 귀를 긴장시키는 뻐꾸기소리와 기차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며 환청 같은 윤석의 목소리와 새벽기차의 노랫소리에 두 눈을 비비며 두 귀를 후벼 파야만 했다.
다음날 아침밥 대신 머리를 찬물에 감아대며 지각하지 않기 위해 젖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학교로 가는 통학 봉고차에 일분도 늦지 않게 타야만 했다.
그 바쁜 시간 속에서도 퀴라는 통학 봉고차를 타기 전 집 앞 우체통에 밤에 쓴 편지를 살포시 우체통 안으로 집어넣었다.
퀴라와 그 주변에 사는 친구들은 집에서 학교 가는 길이 멀었고 버스가 많지 않았기에 7명의 학생들이 모여 봉고차를 타고 등교를 했다.
통학 봉고차를 타지 못하면 그날은 영락없이 지각이다. 지각도 웬만한 지각이 아니라 오전은 아예 수업을 빼먹어야만 했다. 택시는 어림도 없는 교통수단 - 비싸다는 이유로 부모님조차도 그냥 지각하라고 하신다.
퀴라는 다행히 아침밥을 건너뛴 보람인지 지각을 하지 않았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미자는 퀴라의 선택이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 아침인사도 잊은 채 다가와 말을 건넸다.
“보냈어?”
“응, 집 앞 우체통에 넣었어”
“잘했어, 꼭 답장 올 거야”
“그럴까? 그런데... 자꾸만 그때 그 일이 떠올라”
“야! 잊어버려, 나는 너보다 더한 일도 겪었는데 이렇게 웃으며 살잖아”
“더한 일?”
퀴라는 궁금해졌다. 퀴라에게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일, 그 일보다 더한 일이라니...
“그래! 사실은 나, 나도 사촌오빠한테 성폭행당했었어...!”미자는 잠시 그 고약한 일들을 상기하는지 인상을 쓰며 이를 앙다물었다.
“정말?”
“그래! 내가 그냥 말 안 하고 사는 거지, 나도 그 일은 잊을 수가 없어, 충격이고 아직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하지만 잊고 용서하려고 노력은 해... 사촌오빠가 정신 차리고 공장에서 일도 하고 명절 때 어쩌다 만나면 미안해하는 듯 나를 잘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도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잘 몰랐었어, 사촌오빠가 부모님한테 비밀이라고 하는 바람에... “
“거봐! 너도 생각나잖아, 그 피해는 잊을 수가 없어! 그런 일은 나 자신이 치유를 해야 하는데 잘 안되지.
자꾸 그때 그 일만 떠올리면 울화통이 터지고 또 내가 한 살 두 살 내 나이가 차오를수록 그 사람을 찾아가서 죽이고 싶어 져,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이 자꾸 움츠러들어, 앞으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더욱더 고통이 느껴져”
“현주야? 우리 생각하지 말자! 그냥 미친개에 물린 상처라고 생각하고 우리 그 상처에 밴드하나 꽉 붙이자! 우리 둘만이 아는 상처 알았지? 하하하하”
미자는 웃었다. 웃지 않으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지난 과거의 상처이기 때문에, 그리고 퀴라를 웃게 하고 싶었기에 웃었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친구 미자 네가 있어 나도 행복해!”
“나도, 이히히히”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둘은 다시 헤어져야 했지만 또 쉬는 시간, 점심시간이 있기에 둘은 헤어짐도 다시 만나기 위한 휴식이라 믿었다.
그렇게 오전수업시간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 한쪽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퀴라와 미자의 모습은 다른 아이들에게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날 오후 또다시 영어시간이 다가왔다.
퀴라는 멍하니 수업을 받았던 그날 죄송한 마음과 너그럽고 자상하신 영어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나 매점에서 오렌지 탄산음료수를 사서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수업시작종이 울리고 영어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셔서는 교탁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이 음료수 나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거야?”
“네”
60여 명의 아이들이 “네”하며 소리를 쳤다.
“누가 올려놓은 거지?”
“현주요!”
갑자기 일어나 소리치는 미자의 모습에 퀴라는 얼굴이 상기되어 왔다.
“그래? 고마워!... 고마운 마음 잊지 않을게... 수업 시작 하자! 자 그럼 지난번 숙제 낸 단어 암기, 단어 잘 외워 왔나 테스트해볼까?”
“에잉~~ 싫은데...”
“하하하하 싫어? 그래도~ 하자~”
커다랗고 둥근 눈을 가진 영어선생님은 더 크게 눈을 뜨시며 팔을 추켜올려 얼굴에 가져 다대고는 애교 서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셨다. 그 순간 퀴라는 영어선생님의 와이셔츠 소매자락이 올라가 있는 팔뚝을 보게 되었다.
“아! 저 저건, 그래서, 늘 긴팔을 입으셨나?”
흰 와이셔츠 소매가 살짝 올라간 팔뚝살, 그곳에 푸르스름한 무늬가 희미하게 보였다.
무늬가 희미한 것을 보니 지우려고 한 흔적 같은데, 그래도 남아 있는 무늬가 어쩔 수 없는 문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퀴라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 아저씨! 그 아저씨도 있었는데...”
퀴라는 고개를 숙였다.
“차현주? 오늘 선생님한테 음료수도 주고 했으니 한번 해보자”
“네?..... account... 에이.... 씨.... 씨.... 오.... 유엔티”
퀴라는 깜짝 놀라며 문득 떠오른 단어의 스팰링을 떠듬떠듬 웅얼거리듯 내뱉었다.
"현주 어디 아프니? 왜 그래? “
“아뇨, 떨려서요”
“그래? 그럼 다음은 미자가 해보자”
“저.... 저요? 저는 어카운투.. 저는요 이것밖에 몰라요,,...”
“하하하하... 호호호호”
미자의 말과 행동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요란했다. 웃음소리 가득한 교실 안에서 퀴라는 영어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앞으로도 관심을 더 받고 싶다 생각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고였다.
“현주야? 너 수업시간 내내 왜 그랬어? 영어선생님이 자꾸 너만 쳐다보는 거 몰랐어?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 줄 알아? 너는 내가 눈치를 줘도 안 쳐다보고 울상으로 창밖만 쳐다보고 있고, 너 엄청 혼나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영어선생님이 넘어가시는 것 같더라고 너 왜 그래?”
미자는 수업시간 내내 퀴라만을 지켜봤다며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응, 그냥”
“왜? 무슨 일이야?”
“아니야 다음에 말해줄게 오늘 너무 힘들다 나 조금만 쉴게...”
퀴라는 미자가 자리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며 책상에 얼굴을 묻어 버린 채 눈을 감았다.
그날 퀴라는 깜깜한 밤하늘의 별들이 퀴라를 반겨줄 별 하나 찾아 헤매듯 어지럼증에 시달리며 야자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퀴라에 그런 어지럼증 증세가 한 달이 넘도록 퀴라를 괴롭히고 있을 무렵 퀴라에게 행운의 편지가 도착했다.
“현주야? 너한테 편지가 왔다. 이름도 없고... 누구한테 온 거니?”
퀴라의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퀴라에게 하얀색 봉투의 편지를 들고 오셔서는 퀴라에게 건네주었다.
“아, 이거, 친구한테 온 거예요”
퀴라는 깜깜했던 머릿속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갔다. 편지를 보낸 지 한 달이 넘도록 답장이 오지 않았기에 배달주소가 다르거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생각하며 답장을 포기했던 퀴라에게 윤석의 답장이 쥐어져다. 급한 마음에 가방을 벗어놓지도 않은 채 편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앉아 편지봉투를 조심스레 뜯었다.
퀴라가 보냈던 편지지와는 사뭇 다른 - 일반 편지지였지만 작은 글씨들은 퀴라의 글씨체보다 더 예쁘고 정갈해 보였다.
“퀴라야, 잘 지내지?”
갑자기 온 너의 편지에 좀 놀랐어!
네가 떠나고 난 후 매일 우체부 아저씨만 기다렸는데 편지는 오지 않았지.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공부하느라 생각지도 못했고 지금은 대학생활하며 동아리 활동하느라 너무 바쁘게 지내다 보니 편지 생각조차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편지를 받고 나니 너무 기쁘구나! 나는 지금 우리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해 있는 대학교에 다녀... 고등학교는 너도 알지? 시장에 갔다가 집에 올 때 한 바퀴 돌아온 적 있었던 고등학교 말이야. 거기 다니다가 지금 대학교에 운 좋게 합격해서 다니고 있네 하하하...
사실 고등학교는 성적이 안 좋아서 그냥... 거기 갔어, 집 가까운 곳이고, 퀴라는 여전히 공부 잘하지? 언제나 이쁘고 똑똑했었으니 나보다 더 나은 학교에 다닐 거라 생각되네.
그리고 골목 안 친구들과 예전에 같이 놀았던 애들은 자주 만나지 못해, 서로 바쁘고 또 타지로 대학도 가고, 연기 알지? 연기는 공부 잘해서 서울로 대학 갔어, 그리고 순남이는 대학을 가지 않고 방직공장에 취직했어. 그러니 자주는 만나지는 못하고 명절 때 약속을 하거나 직접 찾아가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 볼까 말까 해.
퀴라야? 너도 잘 지내고.... 너는 아직 고등학생이겠구나!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야해, 알았지? 그리고, 우리가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퀴라야 잘 지내 안녕. 윤석이가...
편지를 다 읽은 퀴라의 눈가에는 촉촉이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맞아, 오빠는 역시 그때 그 일이 생각나서 나를 잊은 것일지도 몰라 흐흐흐흐”
퀴라는 윤석오빠를 붙잡고 “그때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입술만...“라며 대책 없는 해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퀴라의 가슴은 찢어지게 아파왔다. 입술만이라니? 사춘기 여고생에게 남아 있는 상처가 그 더러운 입술이라니...
퀴라는 자신의 입술을 마구 잡아당겼다. 학대라도 하면 그때 그 괴물의 체액이 모두 사라지고 말 것 같은 기분에 마구 잡아 뜯었다.
“현주야? 너 왜 그래? 입술이 왜 그러니?”
“아, 입술을 깨물었어요”
“으이그 잘 먹지, 급하게 먹으려다 그랬구나?”
"네 “
화장실에서 나오는 퀴라를 바라보시던 퀴라어머니는 걱정이 되시는 듯 퀴라의 입술을 어루만지셨다.
퀴라는 그날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일 미자한테 윤석오빠의 편지를 보여줘야겠다. 내가 또 답장을 해도 될까? 아니지... 안되지!” 편지를 쓸까 말까 수천번의 갈등을 하다 새벽녘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열어 편지를 꺼내 접고 또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미자가 교실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미자가 무거운 가방을 머리에 이고는 교실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퀴라는 가방을 얼른 받아 미자의 자리에 놓아두고는 미자의 손을 이끌며,
“미자야? 매점 가자! 오늘은 내가 노을빵 사줄게”
“그래? 좋지”
“편지 왔어....”
“응? 편지? 아..... 그 오빠? 정말? ”미자는 무척 놀라며 편지를 보여주기를 재촉했다
“응”
“왔구나! 정말, 어디 봐봐”
미자는 퀴라에게서 편지를 빼앗듯이 받아서 한눈에 읽어 내려갔다.
“음....”
“그렇지? 그렇게 내가 반가운 거 아닌 것 같지?”
“글쎄, 이 오빠 바쁘다잖어,, 그러니까 그런 거야...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
“아니야, 그때 그일 때문에 오빠가 내 편지를 반가워하지 않고 있잖아 봐봐! 맨 아래, 인연이 있으면, 라고 쓰여 있잖아”
“그러게.... 대학생이면 시간도 많을 텐데... 바로 만나자고 할 줄 알았는데....”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동아리인가 뭐 그거 때문에 바쁘다니 그럴 거야~ 더 지켜보자”
“그럼 답장을 해야 해?”
“글쎄, 근데 이 오빠 공부 못하나 보다. 그렇지?”
“그런가 봐, 공부 잘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럼 하지마! 넌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괜히 상처 덧나게 하는 남자는 좋지 않을 듯해”
퀴라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퀴라는 한편으로는 답장을 하고 싶었다.
“나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단호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오빠가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꾹 참았다.
퀴라는 잠이 들 때도 잠에서 깨어 있을 때도 윤석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도했다.
“윤석오빠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오빠에게 그때 그 일은 다 잊게 해 주세요”
그런 기도 때문이었을까?
퀴라는 꿈속에서 윤석을 만나 열심히 해명을 하며 기억을 없애주려고 나오지도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목이 터져라 애를 썼다. 하지만 해명을 할때마다 퀴라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윤석은 어느새 눈물만 흘리는 퀴라를 뒤로한 채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매일밤 꿈속에서 윤석을 찾아 헤매며 해명하느라그런지 퀴라는 아침이 되면 너무나 피곤했다.
무릉도원에서 윤석을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꿈이었다면 이리도 피곤하지 않았을 텐데... 퀴라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학교에 도착해 책을 펴고 고개를 저어 본다.
“공부하자! 공부하자!. 그래 잊자! 잊자!”
1교시 종이 울리고 영어시간이 되었다.
“오늘 영어시간에는 단어시험을 보기로 했지?”
“아우...”
1학년 3반 모두들 침통한 표정으로 소리를 쳤다.
영어선생님은 오늘도 긴팔의 흰 와이셔츠를 입고 책상 사이사이를 금을 그어대듯 지나다니며 단어시험문제를 불러주셨다. 영어선생님이 퀴라의 근처에서 발을 돌려 지나칠 때마다 퀴라는 영어선생님의 팔뚝을 집중적으로 바라보았다.
“왜! 문신을 했을까? 그 아저씨처럼 나쁜 사람들이 하는 건가? 그러면 영어선생님도 그런 분일까?”
퀴라는 마음속으로 영어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면, 양면성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영어선생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인자하셨다.
“자! 오늘 영어 단어시험 백점 맞는 사람에게는 내가 빵 사준다고 했지? 어디 보자 누가 백점 맞을까?”
“너무해요 90점까지 사주세요”
학생들은 모두 다 입을 맞춰 90점! 90점! 노래를 불렀다.
“하하하하 그러면 오늘은 그렇게 할게 오늘만이다”
“네!”교실은 떠들썩해졌다.
영어단어시험이 끝나고 짝꿍과 바꿔 채점을 했다.
“어머! 현주 빵 먹는다”
옆에 있던 퀴라의 짝인 은숙이가 퀴라의 영어단어시험지를 채점하다 퀴라가 빵을 먹게 됐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3반에서 100점은 안 나왔지만 현주? 95점, 가장 잘 봤으니 대표로 빵 사 올래?”
“네... “
그날 90점 이상인 학생들은 겨우 4명이었다. 하지만 3반 전체가 빵을 먹었다는 사실... 영어선생님은 그렇게 마음이 넉넉하시며 인자하셨다.
“그래! 우리 영어선생님은 그럴 리가 없어”
퀴라는 혼잣말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며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하지만 주위 친구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는 퀴라의 생각들을 더욱더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현주야? 너 그거 알아?”
“뭐가?”
“영어선생님 팔에 문신, 용꼬리 같지 않니? 어머 무서워”
“그래?”
퀴라는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놀라움으로 다시 돼 물었다.
“응! 너도 놀랬지? 그 선생님 젊었을 때 한가닥했었나 봐! 그런데 어떻게 선생님이 됐지?”모두들 궁금하다는 듯 웅성거리는 틈을 타서 퀴라는 소리쳤다.
“그거야 뭐 나중에 늦게 철이 들은 거겠지! 늦었어도 잘된 거 아니야?”
“그래 하긴 영어선생님처럼 착하시고 좋으신 분은 없는 것 같애”
퀴라는 체면에 걸린 듯 자꾸 영어선생님이 생각났다. 둥그런 눈동자와 커다란 손바닥 그 모습들이 자꾸만 퀴라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나 왜 이러지? 내가 영어선생님을 좋아하나?”
퀴라는 영어수업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마다 거울을 보며 속눈썹을 뒤집었다. 조금이라도 속눈썹이 길어 보이게 하려고 투명테이프로 눈꺼풀을 올려도 보고 이쑤시개로 줄을 그어 조금 더 큰 눈을 만들기도 했다.
“야, 야 너 절개도 없는 여자구나! 호호호호”미자는 퀴라의 퀴라답지 않은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질투스러운 미소를 지어댔다.
“절개? 내가 뭐? ”
“너 그 오빠 좋아하잖아 그러면서 영어선생님을 또 넘보냐?”
“뭐? 하하하하하, 너도 그랬잖아 그 오빠 공부 못하고 만나면 상처 덧나게 한다고 잊으라며, 그래서 나 이제는 바꿔보려고 하는데 뭐 잘못된거 있니? ”
“계집아이! 못됐다”
퀴라는 미자의 말이 자꾸만 자꾸만 메아리치듯 가슴에 쿵쿵 와닿았다. 저녁시간 저녁을 대충 먹고 나서 퀴라는 매점 자판기에서 코코아 한잔을 뽑아 미자에게 가져다주며 조심스레 물었다.
“편지 한번 더 써볼까? 그래도 어릴 적 나의 백설공주 동화책 속 왕자님 같은 존재였는데... 날 금방 잊지는 않았을 테고, 대학생이니 시간도 나보다는 많을 테고...”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한번 더 써봐! 그래야 너도 속 편하게 공부하던지 춘향이가 되던지 하지 호호호호”
“뭐라고? 너 미자 미워”
“하하하 하하하”
웃고 떠드는 사이에 저녁시간이 지나고 야간자습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퀴라는 야간자습시간 국어노트 뒷장 한 칸 뜯고 연필을 들었다.
“오빠?” “오빠” 오빠라는 단어만 쓰다 지우고 하기를 여러 번...
“오빠? 나는 지금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을 하면서 오빠가 자꾸 생각이 나네요. 어릴 적 오빠가 저에게 난생처음으로 영화를 보여 주었던 그날, 내손등에 난 사마귀를 어루만져주었던 그날, 그리고 우리의 아지트, 달걀귀신이 있다고 믿었던 저, 오빠는 저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데 동네 짓궂은 아이들은 그 말을 믿고 우리의 아지트를 무서워서 지나가지 못했던 그런 날들, 그런 모든 것들이 오빠가 저를 위해 계획했던 일들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저는 고맙고 행복했어요.
그리고 오빠가 저를 위해 꼴뚜기튀김을 사주었던 그날, 밤마다 우리 집 높은 담벼락 뒤 논두렁으로 들어가 담벼락에 매달려 ”뻐꾹뻐꾹 퀴라야? 퀴라야! 부르던 달 밝은 밤.... 그런 날들을 결코 잊지 못합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는요 오빠가 저에게 해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네요.. 그리고,,,, 어떠한 실수도 꼬임에도 빠져들지 않을 텐데.... 또, 저는 후회되는 일들이 아주 많이 남아있습니다. 오빠! 정말 우리가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는 만날 것이라고 저도 오빠처럼 믿고 싶어요. 그리고 만일 앞으로 인연이 없더라도 만나지 못한다 해도 우린 이미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꼭 전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보냅니다. 오빠!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요? 참 궁금하네요.
오빠! 건강히 잘 지내고 인연이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그날까지 안녕히...
퀴라 올림.
퀴라는 되풀이된 문장 여러 장을 썼다가 휴지통에 버리고 난 후 예쁜편지지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예쁜 편지 봉투에 담아 우표를 붙였다.
“이 편지를 받고 윤석오빠는 어떤 생각을 할까? 혹시 내 편지 때문에 대학생활이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편지 보낼까! 보내지 말까! 오빠의 마음을 알아내기 위해 내 욕심에 이렇게 쓰는 걸까?”우표를 붙이고 나서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며 퀴라는 빨간 우체통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