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맛을 알게 해 준 역경
1997년 2월 1일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올렸고 셋째인 효자 남편은 부모님과 함께 살기를 원했기에 신혼생활을 시댁에서 해야만 했습니다. 부모님이 경제적으로도 힘들어 보이시기에 분가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시부모님도 공무원인 자식부부가 자랑스럽다며 동네에 자랑하시느라 바쁘셨고 60이 넘으신 연세에도 손주 하나 없었는데 결혼하고 바로 우리 딸이 생겨 첫 손주도 생기고 하니 너무도 행복해하셨습니다. 평온하게 행복하게 시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던 5년,,, 하지만 누군가 시샘을 무척이나 하셨는지,,, 시댁살이를 5년 하던 중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순진해 보였는지 주변 지인들이 보증을 서 달라 돈을 빌려달라 금방 갚는다 해서 친척, 지인들에게 보증과 모은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믿고 해 준 건데 그렇게 다해주고 나니 나머지 스트레스와 해결은 우리 부부에게 남겨진 숙제가 되어버렸고 결국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시부모님은 압류통지 우편물에 놀라서 매일 우울해하셨고 우리 부부는 죄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효자였던 아들이 막심한 불효자가 되었기에 저는 더욱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의 여파로 우리 부부는 직장 잃었습니다. 시골동네에서 부모님을 욕보이며 살기는 너무 비참하고 죄송스러웠기에 고민하다 내린 결정은 도망가자였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듯 우리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타지로 이사를 갔습니다. 간신히 건진 퇴직금으로 작은 가게 월세를 얻어서 하루 17시간 일하고 4시간 자고 아이를 돌보며 일해도 하루가 모자를 정도로 밤장사 일을 했습니다. 임신한 몸으로도 무거운 맥주잔 6개를 들고 나르고 뛰고 그러다 넘어지고 유리잔이 깨져 발목을 다치고,,, 발목에 피가 흘러도 일을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둘째 아이를 8개월 만에 조산했습니다. 아이를 낳고도 배를 움켜쥐며 일을 했습니다. 5년을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 남아있던 빚도 갚고 돈도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고향에 가도 되겠다 싶었는지 남편은 저에게 고향에 가자고 말을 했습니다. “여보? 우리 이제 그만 가자, 고향 가서 이 돈으로 또 작은 가게 차리고 열심히 살면 될 것 같아, 부모님도 우릴 기다리시고,,,”
사실 저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의 안쓰러운 모습에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 가자 근데 이제 이렇게 힘든 장사 아니고 좀 편한 거 하고 싶어”
“알았어 우리 박람회도 가보고 여러 군데 알아보고 결정하자”
그렇게 우리 부부는 고향으로 갔습니다. 2005년,,,,,,
타지에서 밤낮으로 고생하며 벌어놓은 돈으로 고향에 내려와 그 당시 인기를 타던 저가화장품 가게를 열었습니다. 물론 인기만을 노리며 차린 가게는 아니었습니다. 박람회도 다니며 그동안 몸을 고생시켰으니 이제 몸 조금 고생시키는 업종을 하자며 선택한 업종이었습니다. 체인점이다 보니 많은 돈이 들어갔기에 부족한 돈은 대출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생계가 달린 가게는 1년 만에 체인점주의 횡포(제품이 없다, 그 도메인은 우리가 쓰려한 건데 왜 쓰냐?-어이없는 말들, 홍보도 없어지고...)로 결국 비싼 월세도 지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가게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었기에 문을 닫았습니다. 가게임대 2년 계약 중 1년의 월세는 보증금에서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타지에서 죽도록 벌어온 돈도 날리고 또 빚만 남은 우리. 정말 이젠 다시 가게는 하지 말자는 생각과 함께 저의 생각을 남편에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우리 취직하자, 그래서 빚이라도 갚자” 저는 남편에게 취직하자고 말을 했는데 그 순간 웃음이 났습니다. “저렇게 마르고 휑한데 어디서 누가 오라 할까” 남편이 안쓰러워졌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인구직 신문을 보며 여러 군데 전화를 걸고 면접을 갔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여보? 안 되겠어 그냥 당신은 공부하고 내가 직장에 다녀볼게.. 작은애는 친정에 맡기자” 이렇게 제가 제안하자 39살 남편은 마지못해 알았다며 마지막 1년을 나이제한 남겨둔(40세 연령제한 시험) 시험에 도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책값도 비쌌기에 우선 한 달만 서점에서 조금씩 보고 오라 했습니다. 한 달 후면 제가 월급을 탈 수 있고 그러면 책도 사 줄 수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3개월 단기 일자리에 뽑힌 저는 남편 책사줄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 후 남편에게 책을 사주었고 원룸에서 공부를 하기 어렵기에 독서실에서 견뎌보라며 독서실 비용도 내주었습니다. 그렇게 5달.... 우리 가족의 삶에서 5개월을 빼기로 했습니다. 그건 5개월 후 시험이 있었기에 도전해 보고 떨어지면 그 후 생각해 보자며 남편도 굳은 결심과 동시에 머리도 밀고 수염도 깎지 않으며 배부름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먹는 것과도 전쟁을 선포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5개월 후 2006년 3월 시험을 치르고 기다렸습니다. 한 달 반을 넘는 기간을 기다리는 동안 고통의 날들을 말해주듯 남편의 치아는 모두 뽑혔고 먹을 수조차 없었기에 두유로 버티기를 두 달,,, 그리고 5월 발표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아침 6시,,, 도청홈페이지에 올라온 합격자명단 3명,,, 가슴 시리고 떨리고 남편은 차마 볼 수 없다기에 제가 눈 크게 뜨고 찾아보았습니다. 정말 다행히,,,,마지막 이름이 남편,, 드디어,,,3명 중 한 명의 합격자가 남편이 되었고 그렇게 감동의 합격을 했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모여 처음으로 식당에서 갈비를 먹었고 노래방도 갔습니다. 그리고 작은 원룸이지만 편안한 집에 와서는 여름 여행계획을 세웠습니다.
“아빠? 우리 여행 가도 되는 거야? 그럼 우리 바다 가자 친구들도 바다 갔다는데 난 한 번도 안 가봤잖아, 우리 바다 가서 모래 속에 아빠 파묻어보자 히히히”
“하하하하 그래 가보자 바다 한 달 동안 가보자” 남편은 처음으로 크게 웃었습니다.
“쉿~ 여기 다 들려 행복해도 조용히~~” 작은 원룸이라 방음이 안되었기에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이불속에서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한 달 동안은 남편의 치아 치료를 위해 남겨두고 2006년 7월에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가족 합체 가족여행지는 바로 바다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일해서 모아놓은 200만 원 전재산인 200만 원을 들고 우리의 보물 경차(티코)에 아이들 두 명과 짐(텐트 등)을 싣고 떠났습니다. 지금생각해 보면 그 작은 차에 사람 4명과 그 많은 짐을 다 싣고 다녔다는 게 이해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충청도에서 완도까지 완도에서 배를 타고 소안도라는 섬까지 가서 미라리해수욕장에 텐트를 쳤습니다. 7시간을 가는 내내 남편은 콧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은 동요를 부르고 저는 남편과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행복이 가득했습니다. 이 순간 뭐가 더 필요할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와~~ 파도가 오면 또르르륵 또르르륵 소리가 나요. 신기하다 신기해” 아이들은 몽돌이 파도에 휩쓸려 굴러가는 소리가 너무 신기하다며 또르르륵 또르르륵 소리에 맞춰 환호의 소릴 질렀습니다. 그사이 남편과 저는 텐트를 치고 저녁준비를 했습니다.
“오늘 저녁은 너무 늦었으니 라면으로 먹고 낼부터 맛있는 거 해 먹자”
“네네네 라면 최고”
저녁을 먹고 나서 해안가를 걷는데 작은 고동도 보이고 따개비도 보이고 미역도 보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먹을 줄을 몰라서 그냥 재미로 잡아다 놓고는 구경만 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정말 아깝더라고요.
그날밤 우리 가족은 짐칸에 있던 아이들이 사용하던 구구단 적힌 플라스틱 노란 책상을 몽돌 위에 펴놓고 완도 마트에서 사 온 과자를 풀어놨습니다. “자 우리 과자파티 하자”
“우와 우와” 몽돌 위에 앉아 파도소리 들으며 과자파티,, 우리 가족은 정말 세상에서 가장행복했습니다. “우리 가족은~~”하고 아빠가 외치면 아이들은 “행복한 가족”
“우리 가족은~~” “즐거운 가족” “우리 가족은” “합체가족”즉석에서 만들어진 구호 덕분에 20여 년 동안 우리 집 가훈이 되었답니다. 힘들고 지칠 때 이 구호를 외치며 다시 한번 힘 솟구쳐봅니다. 그날밤 좁은 텐트(그 당시 텐트라기보다는 그늘막 같은 텐트)에서 잠을 자고 미리 알아둔 마을축제인 개메기축제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참가번호 125번~~” 어딘가에서 번호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엄마 엄마 번호 봐봐 엄마 같아” 축제장 입장 시 나눠준 종이에 번호가 쓰여있었습니다.
“어머 맞네 뭐 주나?” 저는 아이들과 남편이 얼른 가보라는 말에 방송하시는 분에게 달려갔고 가보니 스티로폼에 무언가 담긴 것을 주셨습니다.
“어,,, 어,,, 이건,,, 전복?” 우리 가족 모두는 너무도 놀랬습니다. 맛있고 고급진 전복이라 놀랬을 거라 믿겠지만 사실 우리 가족은 처음 손에 쥐어보는 해산물였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찌해먹어야 할지... 한여름에 어디다 둬야 할지,,, 고민에 쌓여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민에 쌓여있을 때 축제장으로 입장하게 되었고 손으로 물고기 잡기를 시작했습니다.
“난 무서워 해파리 나오면 어떡해,,, 물속에 아무것도 안 보여서 무서워” 무섭다며 안 들어간다는 작은아이는 할 수없이 물밖에서 구경하게 두었고 우리 3명은 정신없이 손으로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우와 우럭이다” “우와 나는 숭어” “엄마 나는 이게 뭔지 몰라 잡았어,,,”
너무도 신났습니다. 흙탕물속에서 손에 잡히는 무언가 물고기를 들어 올리며 환호 치는 모습
상상이 가시나요? 아직도 그 당시의 희열과 환호가 느껴진답니다.
신나게 물고기를 잡는 동안 작은아이는 “엄마 나 보여줘 봐,, 엄마 나 힘들어,,, 엄마 이제 그만 가고 싶어” 라며 보챘지만 우리 3명은 신나서 살이 타는지도 모른 채 첨벙첨벙 뛰어다니며 물고기 잡기를 했습니다.
“우와~~ 우리 많이 잡았다 이거 회도 먹고 구워도 먹고 라면에 넣어도 먹자”
바로 잡은 물고기를 회 떠서 먹으니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물고기 일부는 그곳에 계신 주민분들에게 돌려드리고 먹을 만큼만 들고 다시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재밌게 놀았는지 다들 지쳐서 일찍 잠이 들었고 저는 가져온 전복 박스를 열어보았습니다. 세상에나~~ 전복에 개미들이 달라붙어 있었고 결국 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까운 전복, 그렇게 크고 좋고 많은 전복을 먹어본 적도 없는데 버렸다는 생각에 우리의 이야깃거리로 늘 남아있네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포기를 하고 우리는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른 섬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계획한 것도 아닌데 그곳에 있다 보니 주변에 좋은 섬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길도 노화도 등 여러 개의 섬을 다니며 뜨거운 햇살을 맘껏 받으며 여행을 즐겼습니다. 주변 마을분들도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좋은 여행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간혹 걷는 것이 많아 아이들이 힘들어했지만 다음날의 약속-맛있는 거 사줄게, 아이스크림 사줄게~라는 유혹의 말을 던져주니 다행히 잘 따라오긴 했습니다.
그렇게 3일간 섬여행을 하던 마지막날 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우리는 또 과자파티를 열었습니다. “우와 오늘은 누가 색소폰연주도 하네” 어디선가 악기 연주소리가 들렸습니다. 맑은 바닷물이 몽돌을 또르르륵 또르르륵 데리고 갈 때마다 악기 연주가 더해져 감미로운 앙상블을 이루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감성에 젖어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훔치고 아이들은 어떤 과자를 먹을까 행복한 고민을 하며 잠시 눈과 귀와 가슴을 열어두었습니다.
이렇게 여행을 오기까지 수많은 고충과 고통과 가시덤불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헤치고 버티고 살아온 우리 가족이 너무나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졌습니다.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우린 그렇게 한가족이 되어 여행을 떠났고, 또 다른 행선지를 찾아 떠났습니다. 잠시 바닷가에 내려서 바다를 바라보던 중 작은 배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우리와 비슷한 가족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저기 배 타고 가면 어디 가나요?”라고 선주에게 남편은 물어보았습니다.
“저기 신시도라는 섬에 가요, 이분들은 체험하러 가시는 거고요”
“체험요? 무슨 체험요?”
“2박 3일 먹여주고 재워주고 낚시체험도 해드리고 다해요”
“얼마인데요?”
“30만 원요”
금액을 들으니 우리 가족에겐 너무 큰 것 같아서 잠시 고민을 하는데 갑자기 남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기요 저기요~~ 저희도 데려가주세요 체험할게요”
그렇게 시작된 섬살이 체험. 주인집은 방세개인 독채와 가게가 따로 있었습니다. 한가족이 아니고 두 가족이다 보니 독채집을 같이 사용해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오셨어요?”
“대구에서 왔어요. 아이들 데리고 섬체험하면서 맛있는 것도 먹으려고요 작년에 왔었는데 너무 좋아서 올해도 다시 온 겁니다” 그 가족은 두 번째 오는 거라고 하면서 음식도 너무 맛있다는 말에 기대가 되었습니다. 한여름이라 모르는 가족이 한집에 같이 살자니 좀 불편하긴 했을 텐데 그래도 말동무가 생기고 아이들 친구가 생겨서 불편함은 감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아침상부터 달랐습니다. 여러 가지 회가 나오고 해산물이 가득했습니다. 직접 잡으신 생선과 해산물로 요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낚시체험도 해주시고 새로운 가족과 친구가 되어 사진도 찍고 우리랑 다른 가족의 이야기도 들으며 2박 3일 새로운 여행을 경험했습니다. 지금은 차량통행도 가능해졌다는 말에 다시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어 지네요. 우리 가족은 그렇게 남해 섬여행을 즐기며 이제 동해바다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는 곳마다 특산물도 먹고 아이들 좋아하는 기념품도 사주고 마치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 되도록 살아보자고 했습니다. 욕심 없이 떠난 우리 가족 여행비용에 200만 원도 다 쓰지도 못하고 왔답니다. 사실 지금은 제주도 여행 만가도 4명이 2박 3일 2백만 원 금방 쓰고 오는데 우리나라 바닷가를 다 둘러보았어도 남겨서 왔다니,,, 그리고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미소가 답을 해주네요. 우리 가족 그 후 쭉~ 함께 여행 다니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다니는 여행은 그 어렵고 힘들었을 때 다녀온 여행을 밑거름 삼아 행복이 배가 되어 살아가고 여행 다니고 있답니다.
우리 가족은 행복한 가족, 우리 가족은 즐거운 가족, 우리 가족은 합체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