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고생했어, 금이씨~

20년이 이렇게 끝나는 거야?

by 캔디작가

2025년 12월 31일, 수요일.


연말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어차피 내일도 출근이니까. 아, 아니다. 내일은 출근 안 해도 된다. 회사를 그만두니까.


나, 오금이. 47세. 오늘부로 20년 다닌 회사를 떠난다.


책상 위에 놓인 퇴직 서류를 멍하니 바라본다. 'OO미디어 주식회사 퇴직원'. 내 이름 석 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다. 오금이. 부모님이 금요일에 태어났다고 지어주신 이름. "금요일 퇴근길처럼 항상 기분 좋게 살라고." 근데 지금 기분이 좋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는데 손이 떨린다. 20년이다. 스물일곱에 들어와서 마흔일곱이 됐다. 그 사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둘 낳고, 집도 마련하고... 아, 집은 전세지. 아무튼. 인생의 거의 절반을 이 회사에서 보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 3개월 전으로 돌아가 본다.



2025년 10월의 어느 월요일.


월요일은 싫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더 싫다. 월요일 아침 회의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회의 때문이 아니라 회의에 있는 '그 사람' 때문이다.


"자, 이번 프로젝트 최종 시안 보겠습니다."


박현수 팀장이 스크린 앞에 선다. 52세, 명문대 출신, 항상 웃는 얼굴. 처음 보는 사람은 다 속는다. "와, 좋은 상사 같다"라고. 나도 그랬다. 20년 전에는.


스크린에 영상이 뜬다. 내가 지난 2주 동안 야근해서 만든 홍보 영상이다. 주말에도 나와서 편집했다. 큰아들이 "엄마 또 회사야?"라고 했을 때 죄책감에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만든 영상이다.


"이번 시안은 제가 전체적인 방향을 잡았고요, 팀원들이 열심히 작업해 줬습니다."


박팀장이 말한다. 전체적인 방향이라. 그 '전체적인 방향'이라는 게 "금이씨, 좀 세련되게 해 봐~" 한 마디였다는 건 이 자리에서 나만 안다. 기획서? 내가 썼다. 스토리보드? 내가 그렸다. 촬영? 내가 했다. 편집? 당연히 나. 근데 발표는 저 사람이 한다. 보고서에도 '담당: 박현수'라고 올라간다.


"박팀장님, 영상 퀄리티가 좋네요. 특히 후반부 편집이 인상적입니다."


본부장이 말한다. 박팀장이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방향 잡는 데 꽤 공을 들였습니다." 머릿속으로 그 대머리에 커피를 끼얹는 상상을 한다. 아아로. 따뜻한 건 아깝잖아.


"금이씨?"


상상에서 깼다. 박팀장이 날 부른다.


"어, 금이씨. 다음 프로젝트 견적서 좀 정리해 놔. 내일 미팅 있어."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항상 "네, 알겠습니다"일까. 20년째 같은 대답이다. 주어가 없다. '제가'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그냥 '알겠습니다'. 나를 지운 채로 대답하는 게 습관이 됐다.


▷▷▷▷▷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오늘 반찬은 제육볶음. 배식대의 말자 이모가 내 접시에 고기를 듬뿍 올려준다.


"얼굴이 왜 그래. 밥이나 많이 먹어."


"고마워요, 이모."


말자 이모는 이 회사 구내식당에서 15년째 일하는 분이다. 나보다 회사 사정을 더 잘 안다. 누가 승진하고, 누가 잘리고, 누가 바람피우는지. 식당 아줌마의 정보력을 무시하면 안 된다.


밥을 먹으면서 핸드폰을 본다. 남편한테 카톡이 와 있다.


[정우] 여보, 검진 결과 우편으로 날아왔더라.


아, 맞다. 지난주에 받은 건강검진. 2년마다 늘 하던 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40대 중반부터는 검사 항목이 좀 많아지긴 하던데.


[나] 뭐래? 이상 없대?


답장이 좀 늦게 온다.


[정우] 보니깐 병원에서 내원하라고 나와 있는데, 추가 검사가 필요한가 봐


제육볶음이 갑자기 목에 걸린다.


▷▷▷▷▷


다음날 오전, 병원.


남편이 옆에 앉아 있다. 의사 선생님이 모니터를 보며 뭔가 설명하는데 귀에 잘 안 들어온다. '유방', '종양', '조직검사'... 단어들이 공중에 떠다닌다.


"정밀 검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내 손을 잡는다. 따뜻하다. 남편 손은 언제나 따뜻했다. 그에 비해 나의 손은 늘 차가웠는데, 오늘따라 더욱더 차갑게 느껴진다.


집에 가는 길, 남편이 운전하고 나는 창밖을 본다. 서울의 야경이 흐릿하게 지나간다.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야경은 볼 때마다 예쁘다고 느꼈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여보."


"응?"


"... 아니야."


말하려다 만다. '나 암이면 어떡해?' 그 말이 입 밖으로 안 나온다. 말하면 진짜가 될 것 같아서.


집에 도착하니 큰아들 시준이가 게임을 하고 있다. 중3인데 고등학교 갈 생각은 안 하고.


"엄마 왔어."


대답이 없다. 이어폰 끼고 있으니까. 둘째 시우가 방에서 나온다.


"엄마, 배고파. 밥 뭐야?"


그래. 인생은 계속된다. 내가 암이든 아니든, 저녁은 차려야 한다.


"라면 먹을래?"


"응!"


밥 할 기분이 아니라 라면을 권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면서 생각한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금이야. 내일은 내일의 월화수목금금금이니까.


근데 '내일'이라는 게... 과연 올까?


▷▷▷▷▷


일주일 후,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 선생님이 입을 연다.


"유방에서 종양이 발견됐습니다. 암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