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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Nov 09. 2020

사물 쓰기, 15. 팔찌

흑진주와 오름의 추억

새로 산 팔찌를 잃어버렸다. 꽃 모양의 검은색 자개에 검은색 진주가 올라간 팔찌.


작년 10월, 친구들과 제주 새별오름에 갔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갈대밭에서 사진을 잔뜩 찍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갔는데 웬걸, 사진을 찍으러 가던 길에 뜬금없이 진주 노점상을 발견했다.


진주 보고 가세요. 모두 천연 진주입니다. 하나에 이천 원부터. 싼 값에 가져가시고 좋은 일도 하세요. 저는 이걸 판 돈으로 가난한 나라 아이들 책가방을 사주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매크로처럼 하는 아저씨가 차 트렁크를 열고 진주 팔이를 하고 있더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고 했는데, 같이 있던 친구들이 구경을 하고 싶어 해서 살펴보니 은근히 재미있는 물건이 많았다. 퍼뜩 생각나는 사람 몇이 있어, 그 사람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들 몇 가지와 내 목걸이 하나를 골라두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도 내가 골라주는 물건들을 맘에 들어해서 혹시나 더 건져갈 만한 것이 없는지 뒤적거리던 와중 이 검은 꽃팔찌를 찾았다. 빈티지 상점에 있었으면 필경 몇만 원을 주고도 사고 싶었을 만한 물건이었다. 마침 입고 있던 검은 재킷과 굉장히 궁합이 좋았다. 함께 있던 친구들 세 명이 내가 골라준 목걸이와 귀걸이들을 샀고, 나는 그걸 명목 삼아 팔찌 값을 깎아서 샀다. 근처 카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친구들은 우리가 산 물건들 중 내 팔찌가 가장 특이하고 예쁘다고 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손 사진을 잔뜩 찍었고, 집에 돌아오면 어떤 옷과 어울릴지 고민했다. 짧은 가죽 장갑과 매치하면 정말 예쁘겠지.


꽃팔찌와 나의 마지막 순간

그렇게 열심히 손 사진을 찍던 와중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무리 봐도 이 팔찌와 제주 특유의 현무암 해안이 잘 어울릴 듯하여 해안도로 근방에서 사진을 몇 장 찍어놨다. 그렇게 찍고 뒤를 돌아 친구들이 모여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남이 찍어주는 사진이 필요해서 손목을 걷고 팔찌 위치를 바로잡으려고 했는데, 어라. 팔찌가 없다. 정말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5분 남짓한 시간 사이에, 10미터가 될까 말까 한 거리에서 팔찌가 사라졌다. 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평선을 넘어가버렸고 친구들은 이만 숙소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동선을 그대로 따라 몇 번을 둘러봐도 없었다.


팔찌야 잘 가 안녕

그래, 잠깐 사이에 사라진 것이 이렇게 안 보인다면 이건 찾을 수 없는 물건이다. 언덕의 수풀이 살짝 푹신하도록 겹겹이 쌓여있어 아마도 그 사이로 쏙 들어갔지 싶다. 아니면 바람이 강해서 팔찌가 손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내 동선에서 벗어난 어딘가로 날아갔는지도 모른다. 나보다 친구들이 더 난감해하며 열심히 찾아다녔다. Y는 내게 너무 잘 어울리고 정말 예쁜 팔찌라서, 두고두고 소중하게 간직할만한 팔찌였다며 아쉬워했다. 덕분에 이런 스릴러 무비 같은 사진도 건졌더랬다.


팔찌 줍는 사람들 (줍지는 못했지만)

솔직히 난 빨리 포기하고 싶었다. 상황이 여유로웠다면 더 적극적으로 찾았을 거다. 하지만 너무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하고 있었고, 고작 팔찌 하나를 찾아서 다시 끼고 돌아가겠다고 추워지는 밤바다에서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은 정말 찾아주고 싶었을지 몰라도  그게 싫었다. 고맙고 미안해서 그렇게까지 찾을게 아니다, 아쉽지만 차라리 여기서 사고 여기서 잃어버린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열심히 떠들었다. 내가 아쉬울게 걱정되었는지 친구들은 서로 숨겨놓은 거 돌려주라며 농담을 했다. 흑진주의 저주라며 아마 지금쯤 나에게 팔찌를 판 아저씨에게 돌아가 있을 거라며 떠들어댔다. 우습게도 난 거기서 안도했다.


평소 물건 하나하나 애착을 가지고 쓰는 편이다 보니, 이런 독특한 팔찌가 내 물건이 되었다는 것이 왠지 컬렉터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고 한 번이라도 더 자랑하고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내 물건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더라. 왜인진 모르지만 그래서 빨리 미련을 버릴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J는 아마도 바다의 꽃게들이 그들의 공주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가져 갔을 거라고 말했다. 그럴만한 물건이었다. 내가 주얼리 전문가는 아니라서, 이 물건이 실제로 얼마나 값어치가 나갈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그랬기를 바란다.

흑진주를 닮은 '더 페이보릿'의 레이디 말버러처럼 기품 있을, 꽃게들의 공주가 기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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