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드러나는 진심 같은 거죠
누구나 그럴지 모르겠지만, 내 옷장 서랍은 한 칸이 통째로 양말이다. 내가 직접 사모은 양말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이 사주신 양말, 친구들이 선물로 준 양말, 어쩌다 사은품으로 받은 양말들까지 온갖 양말이 난무하다. 어쩌다 한번 '삘'이 올 때는 양말 분류 작업도 한다. 그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지만, 확실히 난 정말 양말이 많은 사람이다.
내가 언제부터 양말 콜렉터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수능이 끝나고 2012년이 막 시작된 겨울(아마도 이맘때쯤), 친구 H와 밴드 짙은의 공연을 보러 가기로 한 어느 날이었다. 공연 시간 전에 미리 홍대 근처에서 구경을 하다 가기로 한 우리는 상상마당에 구경을 하러 갔다. H가 루돌프 모양 귀걸이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찰나, 거기서 아이헤이트먼데이를 만났다.
양말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나? 양말 하나에 대략 5천 원, 대학생에겐 조금 비싼 가격이지만 도전해볼 만한 했다. 굳이 이름을 따로 적어두지는 않았다. 외울 필요가 없는 네이밍이었기 때문이다. 월요일이 싫어서 양말로 기분전환이라도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맘에 들었던 몇 가지 디자인을 기억해 두었는데, 그중 하나 (사진의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품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살까 말까 고민하며 잊어버렸다가 29cm에 입점한 것을 알게 되고 나서 몇 개를 샀다.
사진의 첫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양말은 내가 발뒤꿈치에 구멍이 나도록 신고 다녔다.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양말들이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활 내내 뭘 입어도 양말을 제일 신경 쓰고 나가는 사람으로 지냈다. 아마 이때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 홍대에 가지 않았더라면 내 대학생활에 웃기고 귀여운 양말들은 없었겠지.
양말은 여전히 자주 사고 있지만 취향이 조금 바뀌었다. 예전에는 뭘 입든 양말에 포인트를 주는 게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레이스 양말도 자주 신고, 꽃무늬 토끼무늬 온갖 무늬의 양말을 신고 다녔더랬다. 그런데 지금은 어쩐지 단색 양말이 좋아졌다. 고르는 옷 취향도 조금은 변했다. 남들이 보기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귀여운 양말은 언제나 환영이지.
작년 4월 엄마와 오사카 여행을 가서 투투안나의 양말들을 사 왔다. 언젠가 이 곳의 양말을 신어보고 싶다고 생각했고, 난 확실히 귀여운 양말들을 건졌다. 누가 봐도 이번 여름을 노렸을듯한 양말(맨 오른쪽)은 정말이지 신을 날을 벼르고 있었는데, 결국은 안 신었다. 왼쪽의 하얀 양말만 5월에 한번 개시한 후로 신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이 내 스타일링의 과도기인가 보다. 예전에는 사뒀던 옷들로 적당히 매치하면 만족스러웠는데, 이제는 스무 살 무렵의 취향에 부합하던 옷들을 입으면 (새 옷이든 헌 옷이든) 어쩐지 어색하다. 밸런스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양말을 단색으로 고르고 있다. 지난해 흰 양말과 검은 양말을 여러 개 샀다.
그리고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나흘 동안 검은 양말만 신었다.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출퇴근에 러닝화를 매일 신다 보니 더욱더 단색 양말만 신고 다니게 된다. 돌이켜보면, 난 대학교를 다니며 로퍼 바닥이 떨어질 정도로 로퍼를 잘 신고 다녔으니까 무늬 있는 양말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출퇴근을 하면서는 뛰기 좋은 신발이 우선이 되었다. 계단을 많이 오르내리고, 사람들 발에 자주 밟히게 되니 신발도 전투적인 것이 우선이다. 생활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생존이 되었다. 날렵한 러닝화에 어울리는 양말을 신으려다 보니, 아마도 단색 양말을 더욱 자주 신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예쁜 것을 신고 싶은 마음에 모아놓은 양말들이 아직 많다. 추워지면 부츠 위로 살짝 드러낼만한 양말들도 물론 있다. 양말 자랑을 하기에는 봄과 가을이 가장 좋지만, 겨울의 양말들도 제 역할을 할 줄 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Y에게 받은 호랑가시나무 양말을 신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