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속절없이 초기화시키는 그녀
한 지인의 권유로 새로운 독서모임에 가입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글을 쓰다가 문득 카페 내부 사진을 채팅방에 올리고 싶어져서, 노트북 뒤로 보이는 아늑한 공간을 찍어 올렸다. 잠시 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여성분이 다가오더니, 뭔가를 테이블에 툭 내려놓고는 돌연 사라져버렸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여전히 친구와 통화중이었기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테이블 위를 살펴보니, 독서 모임 이름이 적힌 책갈피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알고보니 독서모임 회원분 중 한 사람이 내가 올린 사진을 보고 위치를 파악해 인사하러 왔다가, 내가 통화 중이니 책갈피만 남기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때 그녀를 난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문학소녀였다. 굳이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 채팅방에 올리는 사진만 봐도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이며, 일기인지 메모인지 분간하기 힘든 손글씨에서 남다른 내공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시가 그랬다.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쓴 글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 내용이 기가 막혔다. 그녀의 시를 처음 읽자마자 난, 벽을 느꼈다.
그녀의 시를 수차례 읽어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감정이 심오하다 못해 난해한 건지, 아니면 내가 문해력이 부족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녀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어휘력과 가늠할 수 없는 감수성을 지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재능이 지나치게 출중한 사람이었다.
나보다 9살 어린 그녀의 자질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듯 보였다. 글로 밥벌이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글쓰기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사람이었다. 그 사실이 나에게 전에 없던 질투심과 전율을 동시에 일으켰다.
하루는 그녀의 SNS 계정에 시 부문으로 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공식적으로 등단을 한 것이다. 그에 진심 어린 축하의 말을 전하기도 전에, 초라한 내 모습이 먼저 마음에 드리웠다. 작고 마른 그녀가 어찌나 커 보이던지.
그런 그녀가 나의 팬이라고 했다. 내가 온라인에 발행하는 모든 글을 빠짐없이 읽고 좋아요를 눌러 주었으며, 내 책을 사서 남자친구와 함께 북토크에도 참여했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에게 내 글을 홍보까지 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내게 DM을 보낼 때면, 용건과 함께 내 글에 대한 칭찬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그 말들이 분명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없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더 이상 남과 나를 비교하며 괴로워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불현듯 내 삶에 나타난 그녀가, 나를 속절없이 초기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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