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육아휴직 기간동안 글을 많이 쓸 줄 알았다. 아내를 도와 육아는 병행해야겠지만, 회사를 가지 않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시간을 활용해 원고를 여기저기 보내고 책 한 권쯤은 세상에 내놓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육아휴직이 시작되자 회사 다닐 때보다 글쓰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 알 수 없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노트북을 켜고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손가락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고 가슴 한가운데가 자꾸만 무겁게 내려앉았다.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쯤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 상태는 몇 달이나 이어졌다.
내 하루의 컨디션은 글쓰기 여부에 달려 있었다. 글을 충분히 쓴 날은 별일 없어도 기분이 좋았고, 단 한 줄도 못 쓴 날엔 사소한 일에도 쉽게 예민해졌다. 그런데 육아를 하다 보니 하루에 두 시간도 온전히 글쓰기에 몰입하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회사에 나가지 않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없을까 싶다가도, 아이를 보다 보면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걸 실감했다.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 어떻게든 다시 텐션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써보기도 하고, 밤에 집 밖으로 나가보기도 하고, 익숙한 카페 대신 도서관이나 낯선 공간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하지만 글쓰기에 적합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수면 패턴이 일정치 않은 아이를 돌보며 정해진 루틴을 지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모유 수유 중인 아내도 분명 고될 텐데 이런 고충을 내색하기도 애매했다. 게다가 이건 어차피 내 몫이었고 누구에게 하소연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점점 지쳐가던 중에 아내가 제안한 제주도 여행은 마치 구원처럼 느껴졌다. 비록 여행한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진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짐을 쌌다. 7박 8일동안 파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해안도로를 따라 운전하거나,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다 보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어느새 마음에서 싹을 틔웠다.
아니나 다를까, 제주도 여행이 끝났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육아에 매달리는 것도, 노트북 앞에 앉으면 갑갑해지는 것도 여전했다. 문제의 모양과 질감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헛된 희망 탓에 마음만 더 지친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밤,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 듯 떠 있는 까만 하늘을 보며 한없이 작고 초라한 내 존재를 실감했다. 그 광대한 풍경을 보고 있으니 내가 안고 있는 고민들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그조차 순간일 뿐이었다. 일상으로 돌아오자 제주도에서의 일주일은 꿈처럼 흘러가버렸고, 답답함은 여전히 내 안에 가득했다.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면 돌파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글을 쓰다 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결국 글쓰기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며 마주하는 문제는 '덜 써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뭘 써야 할지 막막할 땐 그냥 아무 글이나 써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면 뜻밖의 이야기들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많이 써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할수록 손가락을 더 자주 움직여야 했다. 기분이 울적할 때도, 이유없이 막막할 때도,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해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쓰고 쓰고 또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좋은 글'이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글쓰기는 병이면서 약이었다.
글쓰기는 당근이자 채찍이었다.
글쓰기는 맑으면서도 흐린 것이었다.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만 없었다면 제주도 여행을 좀 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즐겼을 것이다. 제주시에서 겪은 교통체증도 웃어넘겼을 테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피곤해 글을 쓰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책하며 잠 못 이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눈부신 풍경을 마주하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글쓰기를 여념하느라 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는 잘못이 없다. 만약 내가 글쓰기를 전혀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또 다른 무언가를 붙잡고 그로 인해 괴로워했을 것이다. 세상을 버텨내기 힘들다는 핑계 아래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들먹였을 것이다. 결국 문제의 뿌리는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데 있었다. 모든 문제는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할 만큼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글을 쓰는 한 앞으로도 끊임없는 고민에 휘말릴 것이고 더 깊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믿고 싶다.
이번 제주도 여행을 통해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게 됐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묵묵히 꾸준히, 그냥 계속 쓰는 거라는 걸. 터무니없이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그 진실을 재차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섬을 떠돌며 느낀 게 또 하나 있다.
'어쩌면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게 아닐까.'
나는 독서를 통해 성숙해졌고 글쓰기를 하면서 생애 가장 정제된 상태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 중 겪었던 여러 일들을 돌아보면, 마치 '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다.
아내와 생각이 다를 때 그 차이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속으로 불만을 쌓은 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보다는 더 나은 조건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아쉬워한 일. 그렇게 온갖 생각에 휘둘리다 눈앞의 찬란한 순간들을 놓쳐버린 일.
어쩌면 지금도 마음 한켠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응어리는 사실 별로 달라진 것도 없으면서 스스로 더 성숙해졌다고 믿어버린 탓에, 예전처럼 흔들리는 내 모습을 차마 인정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씁쓸하지만, 별 수 없지.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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