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나를 모른다

day 7-2

by 달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산책으로 아침을 적시고 나니 슬슬 배가 고파졌다. 미리 알아본 식당은 오픈 시간이 11시여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인근 동네를 돌아다니다 괜찮아 보이는 가게에 무작정 들어가 보기로 했다. 차 네비게이션에 찍힌 지도를 곁눈질하며 감을 따라 골목골목을 누비던 중 '범일분식'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망설임 없이 차를 댔다.


범일분식은 사전 조사 중에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맛집으로 이미 소문난 곳이라 웨이팅이 있을까 봐 일부러 계획에 넣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데 우리가 도착했을 땐 식당 안에 손님은커녕 적막마저 감돌았다. 외관에서 풍기던 노포의 느낌은 내부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시골 마을에서 세월을 견디며 운영해온 듯한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벽에 빼곡히 붙어 있는 유명인들의 사인이 이곳이 결코 조용한 식당만은 아님을 짐작케 했다.


차를 대는 사이 아내는 순대 백반 2인분을 주문했다. 나는 왠지 이 다음에 다시 올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순대 한 접시'를 추가했다. 음식은 마치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던 것마냥 금세 나왔다. '순대 한 접시'의 양은 생각보다 ㅈ거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막창 순대가 섞여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조금 의외였던 건 순대 백반의 구성이었다. '백반'이라고 하니 다양한 반찬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곳은 단출한 구성이었다. 반찬만 놓고 보면 돼지국밥집에 온 것만 같았다. 그나마 짙은 양념이 돋보이는 깻잎무침이 있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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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가루가 듬뿍 들어간 걸쭉한 순대국이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무심코 한 숟갈 떠서 입김을 불어 식혀 먹자마자, 왜 이집에 사람들이 몰리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깊고 구수한 맛이 일품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순대가 별로 없어 보였는데 국을 뒤적이자 큼지막한 순대가 대여섯 개 정도 들어 있었다.


"순대는 깻잎에 싸서 드시면 맛있습니다."


사장님의 말대로 양념 깻잎에 순대를 싸서 먹어보니 그 맛이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원래도 맛있던 순대가 깻잎과 만나니 단짠의 끝판왕이 됐다. 자극적인 걸 꺼리는 사람에겐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내 입맛엔 딱이었다. 깻잎이 마음에 들어 셀프바에서 두 번이나 리필했다. 한 번은 아내가 다녀올 정도로 아내도 즐긴 눈치였다. 처음엔 양이 부족해 보였지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속이 든든했다.


식사 후엔 늘 그렇듯 '이제 어디 가지?'라는 고민이 따라왔다. 딱히 떠오르는 장소가 없어 숙소 안내문에서 본 '알맞은 시간'이라는 북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다만 조용한 분위기가 특징이라 걱정이 됐다. 현이가 아무리 얌전해도 0세 아기의 변수를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약간의 불안함을 안고 카페 주차장에 들어섰다. 후진 주차를 하려 기어를 바꾸려는 찰나에 정문에 세워진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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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이상, 4인 미만 입장 가능'


순간 멍해졌다. '왜 미리 확인하지 않았을까' 자책이 밀려왔다. 조용한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카페라면 이해할 만한 조건이었기에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차를 돌렸다.


아침 산책과 식사로 피로가 쌓인 데다 현이 이유식 시간도 가까워져서 다른 카페를 가지 않고 숙소로 돌아가 잠시 쉬기로 했다.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이니 여러 곳을 들를 수도 있었지만, 시골 마을 한복판에서 조용한 오후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생일 쿠폰이 오늘까진데 스타벅스라도 갈까?"


아내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스타벅스를 가더라도 바다가 보이는 곳을 가고 싶었지만 근처엔 그런 지점이 없었다. 마지못해 동네 어귀에 있는 스타벅스를 찾았다. 2층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창가 자리는 햇빛에 달궈져 앉을 수가 없었다. 쿠폰을 쓰긴 했지만 8천 원짜리 음료는 밍밍했다. 바깥 풍경도 심심했다. 곧이어 우린 부모님께 보내드릴 선물을 사러 갔다.


하나로마트에서 '진지향'과 '카라향' 귤을 각각 한 박스씩 골라 양가 부모님댁으로 택배로 부쳤다. 문제는 옥돔이었다. 아내는 옥돔을 꼭 선물하고 싶어 했지만 마트에서 파는 냉동 옥돔은 너무 비쌌다. 인근 수산 전문점들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이따가 나 혼자 올레시장에 좀 다녀올게."


서귀포 올레시장은 숙소에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왔다 갔다 하면 최소 한 시간 반은 걸릴 것 같았다. 아내 혼자 밤길을 운전하는 건 영 내키지 않아서 그냥 함께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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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시장으로 향하는 동안 기분이 점점 가라앉았다. '차라리 스타벅스에 가기 전에 올레시장을 들렀으면', '여행 마지막 날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야 하나'라는 생각에 얽매였다. 숙소에 도착하면 현이 저녁 이유식을 먹일 시간이 될 테고, 씻기고 재우면 하루가 끝날 터였다.


가라앉던 기분은 점점 짜증으로 변질되어 갔다. 아침의 평온함은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아내가 눈치채지 않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조금이라도 미안해했으면 하는 모순이 마음을 잠식했다. 내 속이 넓었더라면 이왕 들린 김에 올레시장을 조금이라도 즐겼을 텐데, 이미 기분은 엉망이 되어 사진조차 찍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비좁은 내 마음을 뚫고 눈에 들어온 가게가 있었다. 일본에나 있을 법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꼬치집이었다. 골목 자체가 가게 입구처럼 꾸며져 있었다. 고개만 살짝 내밀어도 내부가 훤히 보였다. 꼬치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차만 아니었다면 당장 들어가고 싶을 만큼 감성을 자극했다.


기분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억지로라도 기억을 남기고 싶어 카메라를 꺼냈다. 몇 장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마음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겨우 몇 컷을 찍고는 금세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텐션은 이미 바닥이었고 억지로 웃기엔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숙소로 향하는 길 내내 찜찜한 기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짜증이 많아졌을까. 단지 여행이 기대만큼 흘러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이 이렇게까지 흐려질 수 있는 걸까. 나를 옥죄던 그 감정은 그간의 좋은 기억들마저 덮어버릴 듯 텁텁하고 거칠었다. 그 기운이 아내와 현이에게 전해지지 않길 바랐지만, 그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마음은 썩어갔다.


내가 모르는 내 모습은 과연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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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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