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1
서귀포에서의 이틀째 아침을 맞았다. 한적한 시골 동네답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초록빛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날은 날씨가 가장 좋을 거라 기대했던 날이었다. 하지만 눈 떠보니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하지만 날씨는 날씨일 뿐. 커피향을 맡으며 평온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제주도에 오기 전엔 아침마다 조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계속 미뤘다. 전날 늦게 잔 것도 아닌데 막상 아침이 되면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새벽마다 잠에서 깨는 현이를 달래느라 피로가 쌓여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여행 마지막날은 운전시간을 최소화하고 싶어서 숙소에서 가까운 '큰엉해안경승지'로 향했다. ‘큰엉해안경승지’라는 단어는 유독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얌전히 앉아 있을 생각이 전혀 없는 개구쟁이처럼 자꾸만 머릿속을 빠져나갔다. 지명이 입에 잘 붙지 않아서 그런지 썩 기대가 되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큰엉해안경승지는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나무 울타리 너머로 펼쳐진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따사로운 햇빛이 파도 위를 때리며 눈부신 윤슬이 시선을 압도했다. 흐리던 하늘은 어느새 맑아져 있었다.
차에서 현이를 내리면서도 '얼른 울타리 앞으로 가보고 싶다'며 되뇌었다. 예상치 못한 풍경에 정신이 팔려 제법 강한 바람이 아이를 춥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부모의 본분을 빼앗기고 사고가 마비된 듯했다. 옆에 아내가 있어 다행이었다.
한동안 바다에 빼앗겼던 시선을 거두고, 우리는 왼쪽과 오른쪽 중 하나의 길을 골라야 했다. 어느 쪽이든 좋아 보였지만, 왼쪽길은 마치 동화 속 비밀 통로처럼 숲이 울창하게 뻗어 있어 그쪽을 택했다. 무성한 나무들이 머리 위를 덮어 그늘이 드리워지기도 했고, 고개를 돌리면 장쾌한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우기도 했다. 어떤 구간에서는 나뭇가지 사이로 푸른 바다가 가늘게 반짝였다. 그렇게 애매하게 비치는 풍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 묘한 감정을 음미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차로는 통과할 수 없는 길이 나왔다. 남자 허벅지만 한 통나무들이 이어진 길이었다. 억지로 밀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현이는 유모차에서 곤히 자고 있었고 그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몰라 무리였다. 그렇다고 바로 돌아서긴 아쉬웠다. 아내가 잠깐 있어보라며 혼자 걸어가더니 조금만 더 가면 다시 평평한 길이 나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안고 돌아왔다.
아내가 유모차 앞을, 내가 뒤를 잡고 조심스게 들어 올려 통나무 길을 건넜다.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11kg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들고 나르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팔의 힘이 빠질 즈음에서야 겨우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눈빛을 교환하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을 공유했다.
조금 더 걷자 ‘다른 곳보다 저렴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소품샵과 공중화장실이 보였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펼쳐지는 바다는 여전히 질리지 않았고 볼 때마다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스쳐가는 사람들 중 젊은 이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손님이 부모님 세대였던 녹차밭 카페가 생각났다. ‘우리가 이런 장소를 일부러 고르는 걸까’ 싶다가도, 아직 이른 아침이라 젊은 사람들은 늦게 오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이전의 통나무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장애물이 다시 나타났다. 갈래길 양쪽 모두가 계단이었다. 아기띠도 없이 한 명은 유모차를 들고 한 명은 아이를 안고 오르내릴 자신은 없었다. 아내와 나는 거의 동시에 아무 말 없이 방향을 틀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오는 길에 분명 '한반도 포토존'이라는 명판을 본 기억이 있는데도 그 장소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무심코 지나치기에는 길이 워낙 좁았기에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저만치서 몇몇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사진을 다 찍고 나면 지나가려고 기다리던 중에, 문득 이곳이 바로 한반도 포토존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반도 포토존’은 인공 구조물이 아니라, 숲 사이로 비치는 풍경 자체가 절묘하게 한반도 지형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숲 너머로 보이는 땅과 바다의 경계가 마치 38선을 그어놓은 듯 위아래로 정확히 반반 갈려 있었다는 점이었다. 숲 사이로 보이는 자연의 형태가 한반도를 닮은 것만으로는 억지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하늘과 바다가 나란히 갈라진 모습이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을 비추는 것처럼 느껴져 ‘포토존’이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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