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보다는 서귀포

day 6-2

by 달보


백반이 먹고 싶어 '바굥식당'을 찾았다. 하루 30인분 한정이라 조바심이 들어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 도착했는데 손님은 한 팀뿐이었다. 간판은 없었다. 전면 창에 시트지로 가게 이름만 붙여 놓은 독특한 곳이었다. 메뉴는 사장님의 취향에 따라 매일 달라진다. 그날은 된장국, 두부조림, 오일에 빠진 삼겹살이었다.


테이블 위 냅킨이 아기 주먹만 한 너트에 눌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백반 한 상이 차려졌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기대한 만큼의 맛이었다. 가게 주인은 내 또래로 보이는 남성분이었다. 어르신들이 운영하는 여느 백반집과는 다른 세련된 감성과 맛이 있었다. 다만 밥이 아쉬웠다. 우리는 쫀득한 식감을 좋아하는데 이곳 밥은 다소 꼬들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워 배를 든든히 채운 뒤 근처 카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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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여행을 준비하며 숙소 근처 카페를 찾다가 '수망다원'을 알게 됐다. 드넓은 녹차밭이 인상적이었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서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내겐 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예쁜 사진보다는 아내와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불현듯 9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조용한 카페에 가는 건 민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수망다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별 기대 없이 도착했는데 안내판을 따라 들어서는 순간 기분이 확 좋아졌다. 카페 수망다원의 광경은 사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녹차밭은 황홀할 정도로 근사했다. 흔한 감성 카페가 아닌, 사장님의 아우라가 그대로 묻어나는 차분하고 단정한 공간이었다. 손님들은 대부분 부모님 세대였다.


우리는 뜨겁고 차가운 녹차라떼를 한 잔씩 시켰다. 마침 이유식 시간이라 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는데, 옆 테이블의 여성분이 현이를 무척 귀여워하셨다. 눈앞의 녹차밭을 놔두고 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요즘은 아기 보기 힘들다며 반가워했다.


"저희 둘째도 이제 중학생이에요. 이렇게 어린 아기 보니 너무 오랜만이네요."

아이들을 집에 두고 부부여행 중인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물었다.


"혹시 둘째 계획 있으세요?"

"아뇨, 하나만 키우려고요."

"어머, 안 되죠. 둘째는 꼭 낳으셔야 해요. 저희만 고생할 순 없잖아요!"

유쾌한 분이었다. 한동안 현이를 안고 놀다가 자리를 떠났다.


곧이어 아내가 속삭였다.

"저분들, 부부 아닌 것 같아."


순간 찬물을 얻어맞은 듯했다. 기분을 추스르려 바깥으로 나왔다. 녹차밭 입구에는 무료로 쓸 수 있는 밀짚모자들이 놓여 있었다. 안그래도 눈부신 햇빛이 부담스럽던 참이었다. 사장님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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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에 몽실몽실한 구름이 흩어져 있었다. 그 아래 녹차밭은 정갈한 초록의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인터넷 사진도 예뻤지만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차원이 달랐다. 아내와 현이, 그들을 감싼 자연은 아무렇게나 찍어도 작품 같았다.


햇살에 따라 색이 변하는 아내의 안경은 진한 커피빛으로 물들었다. 현이는 유모차에 앉아 입을 살짝 벌린 채 녹차향을 머금은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현이가 너무 사랑스러워 두 팔로 번쩍 안아 올렸다가 얼굴을 비비며 볼에 입을 맞추길 반복했다. 저만치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여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카페로 돌아가니 손님이 더 늘어 있었다. 창가에 앉은 분들의 시선이 우리 가족에게로 쏠려 있었다. 방금 전 녹차밭에서 놀던 우리 가족의 모습을 구경하던 눈치였다. 민망하면서도 내심 뿌듯했다. 그들 중 일부는 미묘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연이 있을까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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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뒤 숙소 근처 하나로마트로 향했다. 원래는 올레시장에서 회를 살 생각이었지만, 단지 회 하나 때문에 20분 거리를 이동하는 게 번거롭게 느껴졌다. 검색해보니 하나로마트에서도 회를 저렴하게 판다기에 계획을 바꿨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참치가 훨씬 나았다. 양과 가격을 따져보니 참치가 훨씬 이득이었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참치와 한라산 소주 그리고 무알콜 맥주. 서귀포에서의 첫날밤을 채우기에 충분했다. 물론 고급 참치집 코스처럼 세련되진 않았지만 동네 마트에서의 우연한 발견치고는 훌륭했다. 초밥도 함께 먹었다. 그러다 술기운에 짜파게티까지 끓여먹었다. 그 덕에 별 보며 잠든다는 계획은 내려놓고 피곤함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제주시에선 틈만 나면 심보가 꼬이더니 서귀포에 오니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일부러 찾아간 식당이 기대에 못 미쳐도, 아이 때문에 가고 싶은 카페를 가지 못해도, 술기운에 취해 별을 보지 못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면 사람은 마음이 맞는 곳에 있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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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달보의 일상이 담긴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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