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1
제주시에서 서귀포 숙소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현이에게 아침 이유식을 먹이고 나니 어느새 캐리어 두 개는 차에 싣기만 하면 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숙소 내부는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식탁 위엔 짧은 감사 편지와 함께 숙박비를 넣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 받은 만큼 돌려줄 줄 아는 아내의 남편이라는 게 새삼 뿌듯했다.
우린 중간에 어디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서귀포 숙소로 향했다. 현이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 먹이다 보니 냉장 보관할 음식이 많았다. 입실은 여느 곳처럼 오후 3시였지만 주인분께 양해를 구하고 이른 체크인을 허락받았다. 인기가 많은 곳이라 대부분 예약이 차 있는데, 우리가 가기 전날엔 운 좋게 비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막연히 제주시 중심에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도심을 벗어나는 데 5km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교차로 몇 개를 지나자 바람 냄새가 바뀌었다. 광활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쩌면 나는 서귀포로 가는 길 자체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불과 이틀 전에 다녀왔음에도 돌담길과 유채꽃이 가득한 곳으로 다시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들떴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현이는 카시트에서 곯아떨어졌다. 아침부터 혼자 짐을 챙기느라 지친 아내도 이내 잠들었다. 뒷좌석에서 등을 세운 채 자고 있는 모습이 백미러에 비쳤다. 아이를 돌보느라 조수석에서 편하게 눕지도 못하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30분쯤 지났을까. 서귀포 중심부로 진입했는지 양 옆에 숲길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엉터리 미술관'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너머로 동화 나라를 방불케하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금 더 가니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골목길 입구에서 한 여행자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버스도 다니지 않을 외딴 곳이었다. 어디서부터 걸어왔을까. 어쩌다 이곳에 이르렀을까. 여행지에서 한적한 골목을 누비는 걸 좋아하는 걸까. 나는 유독 혼자 있는 사람만 보면 그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숙소까지 10km쯤 남았을 무렵, ‘유해화학물질’ 명판을 단 화물차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차선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진작 앞질렀을 텐데 왕복 1차선 도로가 꼬불꼬불 이어졌다. 화물차는 시속 50km도 안 되는 속도로 달렸다. 서귀포로 가는 길이 아무리 좋아도 커다란 화물차 근처에서 운전하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비상깜빡이 켜고 추월할까?’ 충동이 계속 일었지만 곧 길이 갈리겠지 싶어 참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화물차는 갈림길마다 내가 가려는 길로 앞장섰다. 마치 숙소까지 안내라도 하겠다는 듯이.
‘진작 앞지를 걸.’
뒤늦은 후회에 순간 옆길로 추월하려다 다시 엑셀에서 발을 뗐다. ‘왜 이렇게 조급해졌을까’,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천천히 가도 되잖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깨어 있었다면 분명 속도를 줄이라고 했을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어느새 화물차를 바짝 따라가고 있던 나는, 혹시나 나 때문에 불편했을 운전자분에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속도를 40km대로 낮추고 화물차와 거리를 벌리니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록빛 나무, 낮은 돌담, 파란 하늘. 쓸데없이 신경을 곤두세웠구나 싶었다. 애초에 추월할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름다움을 더 오래 즐겼을 텐데. 나는 여전히 서툴고, 갈 길이 멀었다.
자아성찰의 빌미를 제공한 화물차가 다른 길로 빠지자마자 숙소 골목에 도착했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후진해야 할 만큼 좁은 길이었다. 돌담 사이로 오래된 전원주택들이 줄지어 있었고, 귤밭을 지나 조금 더 가자 예약한 숙소가 나왔다. 마당에 차를 대고 냉장 보관할 음식부터 챙겼다.
숙소에 들어서니 두 감정이 들었다.
하나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감동이.
하나는 그 감동을 짓밟는 짜증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신발장 위 소품들과 회색 벽 장식들이 조용히 우리를 맞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냉장고, 싱크대, 드럼세탁기, 정수기, 드립커피 도구가 놓인 수납장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거실 창가에는 4인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고, 옆 벽에는 2인용 소파와 책, 마샬 스피커가 놓인 협탁이 있었다. 둥근 클래식 냉장고 옆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뒤로 침실과 화장실이 있었다.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이 숙소가 특별했던 이유는 층고에 있었다. 천장이 높으니 공간이 더 여유롭고 그만큼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다음에 제주에 오면 꼭 다시 와야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에 들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이렇게 좋은 숙소가 있었는데 왜 배관이 막힌 화장실이 딸린 곳에서 4박 5일씩이나 버텼을까.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곳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에 따른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좀 더 일찍 이곳에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미련은 삼키고 앞으로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과거에 얽매이는 건 좋을 게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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