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내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day 5-3

by 달보


글을 쓰기 시작한 후로 이전 여행을 떠올릴 때면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이탈리아 신혼여행이 그렇다. 그때도 지금처럼 글로 기록해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시엔 글쓰기가 일상이 아니었다. 걷기만 해도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던 베니스, '반지의 제왕' 속 장면 같은 거대한 호수와 그 둘레의 산세만으로도 벅찼던 레꼬,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듯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던 밀라노 광장, 도시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를 경건하게 만든 두오모 성당, 현대적인 요소를 철저히 거부하는 듯한 다양한 건축물 등 그 모든 걸 보고도 글로 남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도 쓰려면 쓸 수는 있겠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시간이 지나며 기억이 흐려졌고 쓰다 보면 왜곡이 생길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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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제주도 여행에서는 첫날부터 글을 쓸 계획이었다. 이전의 추억들을 제때 기록하지 못한 아쉬움에 매일 그날의 이슈와 본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섯째 날이 되어서야 바다가 보이는 스타벅스에 앉아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동안의 일들을 한꺼번에 돌아보니 기억이 흐릿했다. 다행히 있었던 일을 드문드문 키워드로 메모해 두었던 덕분에 제주에서 본 풍경과 먹었던 음식들, 떠올랐던 생각들을 간신히 되짚을 수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아마 기억이 엉켜서 글쓰기를 미루거나 엉뚱한 이야기만 적었을지도 모른다.


제주도 여행을 하며 근래에 나를 덮친 갑갑함이 조금이나마 풀리길 기대했다. 마치 뭔가에 꽉 조여진 듯한 기분 때문에 새로운 글도 잘 써지지 않았고, 기존에 쓰던 원고를 펼쳐보는 것조차 벅찼다. 때문에 카페로 가면서도 '글이 과연 써질까' 싶은 의구심이 일었다. 그런데 장소가 미치는 영향은 확실히 무시 못하는지, 바다가 보이는 스타벅스 한 가운데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치 좋은 카페에 가도 바깥을 지그시 바라본 기억은 많지 않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게 카페를 가는 주된 이유여서 아무리 멋진 풍경이라도 잠깐 바라보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귀한 자유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인지 이번엔 달랐다. 평소라면 글을 쓰다 쉬는 틈에 SNS나 짧은 영상들을 보곤 했지만, 이 스타벅스에서는 고개를 들어 바다를 바라봤다. 그 순간이 얼마나 좋던지 이미 성공한 인생을 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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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스타벅스 2층은 어디에 앉든 바다뷰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창가 자리였다. 노트북을 펼쳐 놓은 몇 명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창가 자리가 비기만을 기다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누군가가 일어날 기미만 보이면 재빨리 자리를 차지하려 근처로 가 서성였다. 마치 커피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창가 자리를 얻기 위해 온 것처럼 보였다. 그 패턴은 카페에 머무른 3시간 내내 반복됐다. 사람들은 여유롭게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자리'를 확보하는 데 목적이 있는 듯했다. 가만 보면 창가 자리나 그 옆 자리나 몇 걸음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창가 자리에 가까스로 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잠깐 바다를 바라보다 이내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익숙하고 자연스럽지만,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나 역시 혼자 글을 쓰러 온 게 아니었다면 창가 자리를 탐냈을지도 모른다. 가족과 함께라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자리에서 여유롭게 바다를 즐기고 싶었을 테니까. 다만 스마트폰만큼은 장담하기 어렵다. 무심결에 손이 가고 시선이 머물겠지만, 귀한 장소에서 귀한 사람들과 보내는 귀한 시간을 스마트폰에게 쉽사리 내어주진 않았을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열이 오르고, 바다를 보면 다시 가라앉았다. 집 근처 카페보다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 순환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다 되어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조금 더 있다 오라는 연락이 와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글을 써낸 탓에 조금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서귀포 여행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평소엔 아내가 여행 계획을 도맡았지만 이번엔 그런 역할을 내려놓은 듯했다. 그 여파로 제주시에서는 뚜렷한 목적 없이 어정쩡하게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서귀포에서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날마다 최소 두세 군데는 꼭 가보고 싶은 장소를 정하고, 분위기 괜찮은 식당 하나쯤은 미리 골라두고 싶었다. 문제는 검색을 하면 할수록 유명 관광지나 맛집만 눈에 띄었다는 점이다. 여행 초반에 갔던 자매국수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장소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에 '식당', '숲길' 같은 키워드를 넣고 검색한 뒤, 사진을 보고 감각적으로 끌리는 곳을 골라보는 식이었다. 며칠 전에 맷돌콩국수와 냉우동을 맛봤던 명경식당도 그렇게 찾은 곳이었다. 식당 밀집 지역이나 해안가 주변을 피한다면 아직 덜 알려진 괜찮은 장소를 찾아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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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신혼여행을 떠올리며 저녁에 먹은 피자(1인 1피자)


즉흥적이고 감에 의존한 방식으로 서귀포를 탐색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메모장에는 분위기 괜찮아 보이는 장소들이 제법 쌓여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2박 3일 서귀포 일정은 아직 미완성에 가깝지만, 찾아둔 식당과 가보고 싶은 장소들만으로도 윤곽은 충분히 잡힌 듯했다. 숙소 근처를 중심으로 몇 곳만 추려도 제법 괜찮은 동선이 이어졌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걸 왜 여태껏 안 했을까. 매번 아내 혼자 여행 계획을 짜느라 얼마나 번거로웠을까. 동선을 고려하며 일정을 짜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다. 괜히 미안해졌다.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때 마침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고 바다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본 뒤, 도심 속 하얏트 호텔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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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달보의 일상이 담긴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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