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1
'그랜드 하얏트 제주'라는 호텔에서 아내와 아내 지인이 만나기로 약속만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하루 빨리 서귀포 숙소로 옮겼을 것이다. 두 사람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친한 사이였는지 제주 여행 중 벌써 세 번째 만남이었다. 아내를 하얏트 호텔에 내려주고 나는 인근 카페에서 글을 쓰기로 한 것이 이날의 계획이었다. 점심 즈음 만나기로 해 아침 시간이 비어서 좀 쉬다 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제주도까지 와서?'라는 생각이 게으른 우리 가족을 바깥으로 끌어냈다.
우선 김만복 김밥 본점으로 향했다. 예전에 서귀포에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 검색해보니 본점이 제주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귀포에서 봤던 작은 매장과 달리 꽤 규모가 컸다. 아내가 김밥을 사오는 사이 카시트에서 잠든 현이를 지키느라 매장 내부는 보지 못했지만, 건물 외관만 봐도 꽤 잘나가는 가게처럼 보였다.
따끈한 김밥이 식기 전에 용두암 근처로 향했다. 용두암을 보러 가려던 건 아니었다. 현이가 낮잠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아내와 함께 바다를 바라보며 김밥을 먹고 싶었다. 용두암 근처는 주차가 어렵다는 기억이 있어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몇백 미터 전 바다를 마주한 식당 골목에 넉넉한 주차 공간이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도 바다가 시야를 가리지 않아 딱 좋은 자리였다.
오랜만에 먹은 김만복 김밥은 예전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맛은 있었지만 굳이 다시 찾고 싶진 않을 정도였다. 나는 소스에 찍어야 맛이 나는 음식보다는 그 자체로도 맛이 충분한 음식을 선호하는데, 김만복 김밥은 고추냉이 간장이나 오징어무침과 함께 먹어야 제맛이 났다. 비록 맛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간만에 조수석에 앉은 아내와 바다를 바라보며 오붓한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적당히 배를 채운 우리는 용두암 근처까지 온 김에 사진이나 한 장 찍으려고 차를 몰았다. 그런데 골목 어귀를 빠져나오다 눈길을 사로잡는 유채꽃밭을 만났다. 마침 현이도 잠에서 깨 우리 가족은 마치 원래 계획된 것처럼 노란 꽃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지나가던 관광객이 말을 걸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폰을 건넸다. 부모님 세대로 보이는 분이라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진지한 표정으로 구도를 잡는 자세를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괜한 선입견을 가졌구나' 싶을 만큼 노련함이 느껴졌다. 결과물은 기대 이상이었다. 사진에 대한 남다른 조예를 지닌 사람이 찍은 티가 났다. 나였다면 미처 담지 못했을 각도에서 담긴 사진을 보며 뜻밖의 반성을 하게 되었고, 여행의 묘미를 다시금 실감했다.
용두암은 예상대로 그저 그랬다. 유명한 관광지임에도 이상하게 흥미가 생기지 않는 곳이라 대충 사진만 몇 장 찍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많은 사람들이 용두암을 찾는 이유는 단지 공항과 가까워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차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주차장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 자석에 끌리듯 들어가게 되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들어설 때만 해도 가볍게 한 바퀴만 둘러보고 나올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건 아내가 고른 장미꽃 스카프 덕분이었다. 돌도 지나지 않은 현이에게 장미꽃이 수놓인 레트로풍 검은 스카프가 어울릴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내는 한눈에 촉이 왔는지 망설임 없이 현이 목에 둘렀고 우리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아내의 센스가 빛난 순간이었다. 고작 4천 원짜리 스카프 하나로 그리 즐거울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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