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3
송악산 둘레길은 바다 근처를 산책하고 싶어 들르게 된 곳이었다.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처음 가보는 줄 알았는데 막상 주차장에 들어서니 '아, 여기였구나' 싶을 만큼 익숙한 곳이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와 본 곳이었음에도 그곳이 송악산 둘레길이라는 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작 둘레길은 걷지도 않고 스타벅스 2층 창문 너머로 하릴 없이 바다만 잠깐 바라봤던 게 지명을 기억하지 못한 이유 같았다. 난 왜 기껏 그 명소까지 찾아가서는 바다만 보고 말았을까.
몇 번이나 와 본 둘레길을 드디어 걸어보기 시작했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바다는 섬뜩하지만 아름다웠고, 그 보이지 않는 끝점에서부터 매섭게 날아오는 바람은 부담스럽지만 맞을 만했다. 유모차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어느새 산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치 제주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다가 보이는 곳만 가면 왜 그리도 마음이 좋은 쪽으로 이상해지는 걸까.
잠시 후 갈림길이 나왔다. 바닷가쪽으로 걷고 싶었지만 유모차를 끌 수 없는 길이었다. 옆길은 유모차를 끌 수 잇었지만 콘크리트로 무심하게 덮여 있어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유모차를 놓고 갈 수도, 11kg에 가까운 빅베이비를 들쳐 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선택지가 없었다.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한지 사람들은 대부분 바닷가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잠시 후, 우리를 이쪽 길로 인도한 아이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만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드넓은 들판에 유채꽃만 피어 있었다면 여느 풍경과 다를 바 없었을 텐데, 유채꽃 사이로 보이는 말들이 근사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뭘 뜯어먹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말 특유의 날렵한 몸매가 드러나지만 언뜻 보면 소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인가?" 하고 중얼이는 이들이 내 뒤를 지나갔다. 서귀포를 돌아다니면서 유채꽃은 지겹도록 봤다고 생각했는데 꽃밭 사이를 누비는 말들을 보니 마음에 신선하 바람이 불었다.
그곳을 지나 조금만 더 걸어가니 방금 전과는 처지가 확연히 달라 보이는 말을 목격했다. 살아갈 의지를 상실한 듯 뻣뻣한 자세로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이 자기 덩치만큼 떨어진 곳에 앉아있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남자는 말과 함께 인증샷을 찍거나 태워주며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 같았다.
말은 주인의 감시를 받느라 경직된 듯했다. 주인은 메마른 표정으로 훈련의 성과를 음미하는 듯 보였다. 두 존재는 나란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쓸쓸해 보였다. 자유를 억압당하는 걸 유난히 싫어하는 나여서 그 찰나의 장면을 내 멋대로 과장해서 해석했을 수도 있다.
송악산 둘레길. 제법 강하게 부는 바람,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드넓은 평야에 풍성하게 핀 유채꽃, 그 사이를 유유히 오가며 한 폭의 그림처럼 어우러지는 말들, 난잡한 주차장과 달리 둘레길레 적절히 흩어진 관광객들. 이곳엔 다음에 또 오게 될 것 같다는 막연한 여운을 남긴 채, 교통 체증이 예상되는 제주시를 향해 차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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