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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고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진짜 나다운 삶을 산다는 건

by 달보


별 생각 없이 살았다. 학주에게 구렛나루를 잘리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했고, 수업 시간엔 내내 졸기만 하다가 집에 오면 잘 때까지 컴퓨터 게임만 했다. 그 와중에도 연애를 하고 가끔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마음 한편엔 성공하고 싶고 잘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거의 반쯤 포기한 채 살아갔다. 찰나의 순간조차 미래를 떠올릴 여유가 없을 만큼 현실이 나아질 거란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앞날은 불투명했지만 당장의 생활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러다 20대 초반에 운 좋게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변해갔다. 여전히 게임을 즐기고 연애하느라 바쁘긴 했어도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 독서를 하고 운동도 했다. 책을 읽다 보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약간의 독서만으로도 어제와 다른 나를 발견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었고 희망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게임은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연애 기간은 훨씬 길어졌다. 이대로만 살면 크게 성공하진 못해도 적당히 성공한 인생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은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는 동시에 씁쓸한 현실도 마주하게 만들었다. 잦은 퇴사와 친구들과의 거리감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독서가 꽤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은 순간이 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퇴사했다. 책을 읽으며 나 자신을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된 탓이었다. 독서가 깊어질수록 생각에 뚜렷한 방향이 생겼고 친구들과 대화할 때마다 내 의견을 확실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구들은 그런 나를 불편해했다. 결국 지금은 만나면 어색하고 불편할 정도로 멀어졌다.


아마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적당한 곳에서 버티고 버티며 경력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친구들과도 비슷한 생각선을 유지하면서 최소한 지금처럼 절교 직전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다 감수하면서까지 책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점점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체감되진 않지만 책을 읽다 보면 나 자신이 점점 괜찮고 멋진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은 정말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회의감이 든다. '더 나은 나' 같은 게 정말 있을까? 더 나은 내가 되려고 애쓰면 항상 미래만 바라보게 된다. 더 나은 나를 기대한다는 건 현재의 나 자신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령 노력 끝에 더 나은 내가 된다고 해도 문제다. 나는 결국 또 다른 '더 나은 나'를 목표로 삼아 끝없이 발버둥칠 테니까. 한번 빠지면 지칠 때까지 끝을 모르고 달리는 내 성향상 악순환의 굴레에 갇힐 위험이 크다.


꼭 더 나은 내가 되어야만 할까.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노력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故) 신해철 님이 어느 공연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한 것이고, 태어난 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이미 할 일을 다 끝낸 겁니다."


곱씹을수록 진리처럼 다가오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나도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 이미 내 역할을 다한 셈이고 죽을 때까지는 그저 편안히 즐기다 가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작년에 태어난 우리 현이를 키우면서 더욱 강해졌다. 분명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한 지붕 아래엔 나와 아내뿐이었는데, 어느새 없던 생명이 우리 사이에 생겨났다는 게 새삼 경이롭고 벅찼다. 나름대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나를 보고 웃을 때 느껴지는 그 행복은 질감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더 나아지려고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그냥 읽고 싶어서 읽는 삶. 더 나아지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그냥 쓰고 싶어서 쓰는 삶. 그렇게 사는 게 진짜 나다운 삶이 아닐까.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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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달보의 일상이 담긴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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