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토록 멍청할 줄이야

by 달보


영어 회화학원에 등록한 돈이 아깝게도 실력은 전혀 늘지 않은 채 호주 땅을 밟는 게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비행기를 탈 때는 생각보다 덤덤했다. 서툰 영어로 인한 불편함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에 환승까지 잘해서 도착하는 게 더 중요했다. 다행히 브리즈번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meat or fish?”라는 승무원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여권을 내민 민망한 순간만 빼면 말이다.


픽업을 기다리며 공항 앞을 서성이다가 뜻밖의 경험을 했다.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을 봐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뭐 그럴 수도 있지'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 신기했다.


지낼 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쉐어하우스였다. 집주인과 한 방을 쓰면 조금 더 저렴했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한 건물에 여러 세대가 모여 있었다. 계단 벽에 묻은 핏자국이 눈에 거슬렸다. 집은 생각보다 아늑했지만 낯설었다. 마룻바닥 대신 온통 카펫이었고, 화장실엔 슬리퍼나 휴지통이 없었다. 모두가 집주인을 ‘마스터’라 불렀다. 마스터는 나보다 열 살가량 많은 형으로 인상도 좋고 성격도 원만했다. 안쪽 방엔 워킹홀리데이로 온 한국인 세 명이 있었는데, 둘은 친구였고 한 명은 나처럼 혼자였다. 세 명이서 사이가 돈독해 보였다.


짐을 풀고 제일 먼저 한 건 교통카드 발급이었다. 역에 있는 직원에게서 살 수 있었다. 간단한 일이지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내 어눌한 발음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걱정됐다.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수도 없어서 용기를 내서 역으로 향했다. 창구 너머에는 TV에 나올 법한 금발의 여직원이 있었다. 잔뜩 긴장한 나를 보며 그녀는 미소 지었고, 마치 ‘이런 외국인 자주 본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몇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연습한 문장을 겨우 꺼냈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카드를 받았다. 작은 성공이지만 꽤 뿌듯했다.


교통카드를 서둘러 산 이유는 영어학원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3개월 치 수업료를 미리 결제했었다. 브리즈번에서는 번화가를 '시티(City)'라고 불렀는데, 내가 다녔던 Lexis 어학원은 그 시티 한복판이 있었고 지하철로 약 20분 거리였다.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구글맵이 있어 그나마 안심이 됐다.


"형, 밥 짓는 법 좀 알려주세요."

"넌 그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호주까지 올 생각을 했니?"


늘 온화한 미소만 짓던 마스터형이 처음으로 핀잔을 준 순간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길게는 2년간 있을 수도 있었는데 밥 짓는 법도 몰랐다는 게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막상 배워보니 간단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밥을 짓는 건 금세 루틴이 됐다. 학원 때문에 도시락을 싸야 했고 밥솥은 공용이라 매일 밥을 지어야 했다. 덕분에 밥 짓는 솜씨는 금방 늘었다.


그러나 밥보다 더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어학원에 가서 "한국에서 등록한 정치호라고 합니다."라는 말을 냅다 한국어로 뱉었다가 돌아오는 영어를 듣고서야,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왜 호주의 어학원 직원과 선생님들을 당연히 한국인이라 생각했을까. 한국에서 등록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믿어버린 걸까. 생각할수록 정말 어리석은 발상이었다.


교통카드를 살 때처럼 미리 준비한 문장이 없어서 영어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끄러움의 쓰나미가 온 몸을 덮친 듯 화끈거렸다. 다행히 내 정보가 정상적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았다. 잠시 후 레벨 테스트를 봤다. Beginner부터 Middle, Advanced 등 4~7단계로 나뉘는 듯했다. 테스터의 질문에 대충 대답했지만 문법이 엉망이었다. 당연히 가장 낮은 반으로 갈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중급반인 Middle 반이었다. 나는 안 된다고, 그 정도 실력이 아니라며 가장 낮은 반으로 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괜히 높은 반에 들어가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초급반에 들어서니 모두 동양인이었고, 그중 상당수가 일본인이었다. 그들이 일본어로 말하지 않아도 일본인일 거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책상 위가 모두 똑같이 정리돼 있었기 때문이다. 교재, 노트, 필통 순으로 가지런히 놓인 모습은 놀라울 만큼 칼 같았고, 그들의 정서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일본어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인지, 제대로 준비한 게 하나도 없어 스스로에게 실망했다. 연애하느라 바쁘긴 했어도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 어쩌다 이렇게 안일하게 이 먼 곳까지 오게 됐을까. 이제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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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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