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공장에서 밤새가며 교대 근무를 도는 친구의 입사 제안을 마지못해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독서를 통해 삶의 이치와 흐름을 통달한 줄 알고 까분 것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이쯤 되면 누군가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어엿한 가장으로 살아갈 거라 생각했던 시기에, 사랑도 돈도 경험도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그놈은 무슨 바람이 불어 그런 전화를 했던 걸까. 나를 먼 곳에서 관찰하는 어떤 존재가, 점점 늪 속에 빠져가는 나를 보다 못해 친구를 구원의 대리인으로 보냈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의 제안은 서사와 맥락이 결여돼 있었다. 평소라면 집어치우라거나 아예 대답조차 않았을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서글펐다. 괜히 시간을 끌면서, 마땅히 갈 곳도 할 일도 없으니 여기라도 가야 하지 않을까 체념하던 그 순간은 어쩐지 아득하고 씁쓸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전화를 끊고 나니 희한하게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왠지 가족들이 들끓는 이 지긋지긋한 동네를 벗어나야 인생이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근래 들어 자주 들었다는 사실도 그제야 새삼 떠올랐다. 그래, 일단 이곳을 떠야만 했다. 이곳에서 살던 대로 살다가는 심심하면 삶의 고단함을 토로하며 일상의 여백을 채우는 가족들의 유대를 끊어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다. 본받을 만한 게 '저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뿐인 집안 어른들처럼 주어진 환경에 순종하며 '살아지는'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을 직접 '살아가거'나, 최소한 힘닿는 데까지 '살아내고'는 싶었다.
차가 없어도 사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것 같아 조만간 다시 팔까 했던 생각은, 차 없이는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작은 도시로 넘어오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기숙사로 향하는 길, 널찍한 도로엔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았다. 분명 높다란 아파트가 즐비한 도시인데도 갓길에 몇 안 되는 정류장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고향을 벗어나고 싶은 건 맞지만 이 이상 더 멀어지긴 싫은데. 그런 울적한 감정이 마음을 잠식했다. 그런데 잠시 후 뜻밖의 건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최근에 지은 듯한 도서관이었다. 현대 건축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그 커다란 건물은 곰팡이 핀 가슴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듯 정화되는 느낌을 줬다.
나의 유일한 취미가 독서라는 게, 어쩌면 물가 이상으로 가파르게 치솟는 책값 부담을 덜어주는 도서관이 기숙사 바로 옆에 있다는 게, 그렇게나 기쁘고 설렐 줄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친구도 가족도 없는 곳에 무작정 넘어오길 잘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게 아주 근거 없는 감각은 아니었는지, 이후에 다가올 일들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나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둔하지만 본능적인 감각만큼은 꽤 날카로운 편이다. 어릴 적 부모님은 잊을 만하면 "넌 운이 좋은 아이야"라는 말을 가슴 깊이 심어주셨다. 이 세상은 어쩌면 복잡미묘하게 잘 짜인 거대한 연극판인지도 모른다.
밤낮 바뀌어가며 일하는 거친 공장 생활에 적응하는 와중에도, 꼴에 연애는 해야겠어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독서 모임에 가입했다. 훗날 인연으로 이어질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니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활동했다. 지정 도서 완독은 물론이고 열리는 모임마다 필사적으로 참여했으며, 남몰래 탐닉하며 수집하던 문장들도 기꺼이 공유했다. 일단 모임에 들어갔으면 그 모임의 취지를 최선을 다해 따르는 게, 목적이 무엇이든 그에 다가가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길이라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처음 보는 여자와 단 둘이서 독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여럿이 모이는 게 일반적인 독서 모임이라 보통 참여자가 둘 뿐이면 파토 나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누군가를 기다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만나러 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고. 온전한 직감을 따른 게 아주 효과가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똑단발, 새빨간 손톱, 쇄골이 훤히 드러나는 린넨 스웨터,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법한 금귀걸이. 그날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만나고 5분쯤 지났을 무렵,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난 왜 그렇게 그녀를 안고 싶었을까. 얼굴이 예쁘거나 자아내는 분위기가 남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배고프면 음식 냄새만 맡아도 그쪽으로 몸이 향하듯이, 그녀를 봤을 때 힘껏 껴안고 싶은 충동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