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아버지

by 달보


“형, 저랑 카페 가서 공부할래요?”


한참 과제 폭탄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주말마다 낡은 강의실에서 혼자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 한 복학생 동생이 카페로 가서 공부하자며 말했다. 그 당시엔 카페를 그저 커피 마시며 잠깐 대화 나누는 곳쯤으로만 여겼다. 그곳에서 노트북을 끼고 몇 시간씩 과제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었다.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최소 3~4시간은 엉덩이를 붙일 텐데, 그 긴 시간을 카페에서 버틴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날 설득했다. 원래 카페가 그런 용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곳이고, 큰 카페라면 눈치 주는 사람도 없다며. 경험이 없던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그의 말에 이끌려 동성로의 한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텁텁한 공간에 창문이 열린 듯한 기분이 들면서 그간의 걱정이 쓸데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같은 과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심지어 카운터에서는 담요까지 빌려주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제집 안방마냥 자리에 누워 자는 사람도 있었다. 분명 카페를 들어온 게 맞는데 내가 알던 카페가 아닌 것 같았다.


자리마다 콘센트가 있는 걸 보니 애초에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한 공간처럼 보였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곳곳에 콘센트를 마련해둔 카페는 처음이었다. 마음이 놓이니 얼른 과제를 하고 싶어졌다. 지저분한 강의실에서 늘 쓸쓸하고 불편하게 작업하다가, 넓고 쾌적한 공간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펼치니 등에 날개가 돋힌 것만 같았다.


처음 카페에서 과제한 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몰두했다. 새벽 4시쯤 겨우 일어나 근처 국밥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그러고는 지하철 첫 차를 타고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학교로 향했다. 이후로는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비슷한 패턴으로 공부했다. 눈 밑 다크써클은 가실 틈이 없고 몸은 한없이 고단했지만, 교수님께 제출하는 결과물이 하루가 다르게 다듬어지는 걸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점수를 떠나 교수님이 던진 막연한 질문에, 나만의 생각을 고스란히 녹인 과제로써 나름의 답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렇게 나는 카공족이 되었다.




한편 운좋게 과탑을 찍은 후로 예상치 못한 고민이 생겼다. 그건 바로 성적에 대한 욕심이었다. 분명 복학 후 한 학기를 보낼 때만 해도 성적이라는 단어를 당최 머릿속에 떠올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점수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교수님이 내준 과제의 의도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내 생각을 과제에 잘 녹일 수 있을까만이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2학년부터는 '만약 결과가 별로면 어떡하지', '이번 학기 때 성적이 떨어져서 장학금을 못 받으면 곤란한데'와 같은 고민이 뒤따랐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나는 자취방을 얻어 집에서 독립한 상태였다. 큰 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이 모여 자고, 나만 누워도 가득 차는 작은 방에서는 좀처럼 공부가 되지 않았다. 마침 집 옆에 원룸 건물이 새로 올가가고 있었는데, 보증금만 내주면 그곳을 독서실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살아보겠다, 월세는 알바비로 충당하겠다며 부모님에게 약간의 지원을 받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다 전액장학금을 받으면서는 부모님에게 등록금을 내주지 않아도 되니 월세 내는 것을 조금 보태달라고 했다. 그덕에 알바를 그만두고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랐다. 고로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다시 알바를 해야만 했다.


카페라는 훌륭한 장소를 찾긴 했어도,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공부할 수는 없었다. 결코 싸지 않은 커피값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서 공부를 하려고 해봤다. 하지만 의외로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처럼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멍을 때리거나, 티비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무도 없는 환경이라면 당연히 카페보다 공부가 잘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전액장학금을 핑계로 부모님께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월세를 충당하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뭔가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고, 이래도 되나 싶고, 자리합리화를 통해 현실을 왜곡하는 듯한 찝찝한 감정이 들었다. 게다가 카페의 편의성과 쾌적함을 맛본 후로는 더 이상 낡은 강의실에서 여러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은 한 번 고점을 찍으면 좀처럼 그 밑으로는 내려가기 힘들다더니. 사실 나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어떤 상황이든 금방 적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나도 결국엔 여느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존재였다. 그래서 더욱 카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날 따라 노트북을 산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처음엔 그걸 체감하지 못했는데, "너 한 명 때문에 과 전체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교수님의 말을 듣고는 학구열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걸 알게 됐다. 새로 들어온 후배들은 대뜸 찾아와 노트북 구입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면 거의 매일 카페로 간다는 말을 듣고 따라나선 후배들도 있었다. 물론 한두 시간 정도가 아니라 대여섯 시간씩 엉덩이를 떼지 않는 나를 보고는, 혀를 내두르면서 이후로는 함께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젊음의 패기라는 건 실로 존재하는 건지, 저녁에 카페에 들어가면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짐을 싸서 집으로 가야 했지만, 그 과정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물론 중간에 졸거나 아예 옆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는 결과물을 만족스럽게 내기 전까진 어떻게든 자리를 지켜야 했고 시간은 늘 모자랐다. 동이 틀 무렵까지 작업해도 결과물이 썩 내키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밤을 새운 덕분에 한 걸음이라도 나아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되었던 시절이었다. 이 결과물이 당장 나를 어디로 끌고 갈진 몰라도, 공부와 담을 쌓고 살던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밤을 새우면 충혈된 눈은 뜨기만 해도 아프고, 쌀쌀한 날씨에도 눕기만 하면 바로 잘 것 같은 좀비 같은 상태가 된다. 그런 몸을 집까지 질질 끌고 가는 원동력은 조금이라도 해냈다는 뿌듯함이었다. 심지어 그 상태로도 몇 시간쯤 더 공부할 수 있을 만큼의 도파민을 주는 유일한 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런 몰골로 새벽에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칠 때였다.


어릴 적, 아버지와 어머니가 방 안에 누워 있으면 나는 항상 아버지 품에 먼저 뛰어들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기억이라는 게 생기기 이전의 쌓인 본능이 어머니보단 아버지를 좀 더 원했던 것 같다. 그러다 중학생이 되고 수학에 막혀 공부를 포기하면서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아버지와의 사이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물론 가파르게 기운 가세 탓도 있었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상 현실에 빠져드는 아들을 반가워할 리 없었고, 그 감정은 아버지의 눈빛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곤 했다. 그때의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셨지만 그만큼 불만도 많으셨다.


그 전세가 슬슬 역전되기 시작한 건 군대를 다녀온 후 내가 슬슬 바뀌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은 아마도 복학 후 공부에 흠뻑 빠져들면서,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밤을 새며 공부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동 트기 전까지 공부하다 집으로 걸어가는 나, 통 틀 무렵 출근하는 아버지. 어디 다녀온 건지 뻔히 알면서도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어디 갔다 오노?"라며 묻는 아버지를 마주할 때면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이만큼 노력한 결과가 얼마나 좋은 성적으로 이어질지, 사회에서 얼마나 의미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돌아온 아버지의 미소를 마주하고, 그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일터로 향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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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달보의 일상이 담긴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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