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기껏 해야 군 휴학 말고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참 알차게도 썼다. 1학년 1학기 동기들 중 군대를 다녀온 애들과 같이 복학할 줄 알았건만, 나와 같이 군입대를 해서 복학한 애들이 졸업할 때까지도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사이 나는 세 번의 겨울과 네 번의 여름을 바깥에서 보냈다. 여행 경비를 마련하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학원 강사 알바도 해보면서, 마치 본 경기에 들어가기 전에 치르는 몸풀기처럼 분주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 모든 경험이 학교 생활을 알차게 해줄 토대가 될 것이라 믿었다.
복학 후 복도에서 지도 교수님을 만나뵀는데 예전에 인사도 잘 하지 않고 다녀서 날 알아보실까 미심쩍었지만,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준 교수님에게 괜히 죄송스럽고 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나이차가 꽤 나는 듯한 학생들이 나를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알고 보니 4살 어린 여동생이랑 같은 나이였는데, 철없어 보이기만 하던 동생과는 달리 그들은 어딘가 단단해 보였다. 나와 같이 복학한 사람들도 대부분 동생들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형이 한 명 있긴 했는데, 한눈에 봐도 무리와 동떨어져 사는 외골수 같은 기운이 풍겼다. 이전 학생회 명단에서 예전 1학년 1학기 때 같은 반이었던, 나보다 늦게 입대한 친구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내가 얼마나 늦게 복학한 건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학원에서 프로그램 공부를 미리 하고 온 덕에 수업을 따라가는 건 수월했다. 오히려 교수님의 드문드문한 수업 방식이 답답했다. 1부터 10까지 차근차근 가르쳐도 모자랄 판에 3, 5, 7만 집어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메우라는 식이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굳이 강의실 컴퓨터를 두고 가방에 노트북을 넣고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반의 90% 이상이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 먼저 끝내고 딴짓을 하고 있으면 주변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이름이 조금씩 퍼졌다.
어느새 나이 차가 나는 동생들과도 금방 가까워졌다. 경계심 어린 눈빛이 호의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장 마음이 통했던 건 같은 복학생들이었다. 나이는 조금씩 달라도, 새로 적응해야 하는 처지라는 공통점이 우리를 묶어줬다. 물론 그 안에서도 차이는 있었다. 그냥 출석만 하면서 졸업만 목표로 하는 이들과, 복학한 김에 열심히 공부해 보려는 이들. 겉으로는 다 함께 어울렸지만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건 단 한 명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교수님들의 수업 방식이었다. 하필 중요한 전공 과목을 담당하는 교수님일수록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잦았다. 초반 10분 정도 개념을 설명한 뒤, 나머지는 과제로 던져주고 사라지는 식이었다. 다만 나는 그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등학교처럼 모두가 똑같은 정답만 향해 달려가는 게 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과정처럼 여겨졌다. 교수님이 내준 과제의 의도만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내 방식대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지식은 한참 부족했고 그나마 자신 있는 건 프로그램을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뿐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밀어붙였다. 일단 하기만 하면 최소한 반 이상은 간다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아마도 복학하기 전까지의 다양한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는지, 교수님이 무심코 던진 말 속에 담긴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기대하는지 따로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하는 느낌이었다.
실내 디자인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머릿속에 떠올린 공간을 왜 그렇게 구상했는지 설명할 근거와 명분만 확실하다면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함을 안고 개요를 짜고 PPT를 만들고, 평면도를 그린 뒤 3D로 구체화했다. 그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고 작업 시간은 항상 부족했다. 강의실 개방 시간마저 제한적이었다. 노트북을 사 둔 게 얼마나 다행인지 학교 다니는 내내 느꼈다. 학교 컴퓨터를 사용했다면 원하는 만큼의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공강 시간이 있더라도 동급생들과 수다를 떨거나 카페에 가다 보면 공부할 틈은 거의 없었다. 방과 후에는 학비를 벌려고 알바를 했고, 알바가 없는 날엔 같은 반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느라 분주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일부러 아무도 없는 학교로 가 빈 강의실을 찾았다. 콘센트와 책상만 있다면 어디든 좋았다. 우리 과 강의실은 닫혀 있었고 옆 건물 꼭대기층 강의실이 열려 있었다. 자습을 위해 개방했다기보다는 방치된 공간에 가까웠다. 그때는 그런 공간이라도 있다는 게 감사했다. 책상 위에는 낡은 제도판이 설치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었다. 노트북 하나 올려놓기도 비좁았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으면 해가 질 때까지는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어떻게서든 되겠지’라는 믿음을 동력 삼아, 디자인 의도를 남들에게 제대로 전할 수 있겠다고 확신이 들 때까지 과제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시험 기간에는 빈 강의실에서 밤 늦게까지 혼자 과제를 한 날이 많았다. 과 특성상 이론 시험은 없고 전부 과제로 제출해야 해서 할 게 산더미였다. 다행히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작업하는 것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었다. 만약 벽돌책 같은 걸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것이었으면 꾸벅꾸벅 졸다 집에 갔을지도 모른다.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지고 달빛이 은은히 번질 무렵 건물을 나서면, 평소엔 보기 힘든 환한 조명 속 캠퍼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오늘 하루 혼자서 이만큼이나 해냈다는 뿌듯함이 파도처럼 가슴 깊이 밀려왔다.
"쟤가 안수진이야?"
(신상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
한편 과 내에선 과탑으로 유명한 학생이 있었다. 저기 지나가는 애가 안수진이라는 건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같이 입학한 애들에겐 소위 '넘사벽'이었고, 복학생들 사이에선 수군거림의 대상이었다. 겉으로는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애교 섞인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를 듣다 보면 오히려 여느 학생들보다 공부와는 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제출하는 과제마다 퀄리티가 남다른지 모든 교수님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심지어 나처럼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내 눈에는 유독 남달라 보였다. 과는 같지만 다른 반이라 말 섞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기에 더더욱 이질적인 존재 같았다. 교수님을 비롯해 모두가 안수진이 졸업할 때까지 과탑을 유지할 거라고 확신했다. 살면서 1등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나로서는, 안수진이라는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부러운 게 사실이었다.
20대 청춘일 때만 누릴 수 있는 풋풋한 연애도 하고, 젊고 신체 건강할 때 진탕 술도 마시면서, 공부는 공부대로 열심히 하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정신 차려보니 한 학기가 끝나 있었다. 방학 때는 학교 다니는 것만 빼면 나머지는 비슷했다. 2학년 때도 여전히 학비는 내야 했고, 생활비마저 스스로 벌어야 했던 처지라 알바 시간을 더 늘렸다.
그러던 어느 날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학교 청소할 사람이 필요한데 하루만 와서 도와줄 수 없겠냐고. 귀찮았지만 선뜻 수락했다. 졸업 후에는 어찌 될지 몰라도 그전까지는 교수님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게 없었다. 과제하면서 소통을 자주 하다 보니 교수님이 전보다 편하고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여 하루 정도는 거뜬히 봉사할 수 있지, 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학교를 찾아갔다.
"교수님 저 왔습니다."
"어 왔어? 야 근데 너 이번에 좀 열심히 했더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성적표 아직 안 봤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교수님은 나의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이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공부와는 평생 담 쌓고 살았던 내가 스스로 밤새가며 공부하는 맛에 너무 심취했던 걸까. 과 특성상 지필 시험이 없다 보니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과제를 열심히 해놓고 성적표를 들여다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그때 교수님을 뵙지 않았다면 대체 언제쯤 결과를 확인했을까. 성적표를 아직도 확인 안했냐며 나무라는 교수님의 말을 묵살한 채 학교 앱을 켰다. 성적이 뭐 어쨌길래 저러나 싶은 심정으로 성적표를 확인한 순간,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믿기 어려운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평점평균 : A+, 4.43/4.5]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세히 살펴봤더니, 한 가지 과목을 제외하고는 모든 과목에 'A+'가 찍혀 있었다. 나머지 한 과목은 'A'였는데, 해당 교수님은 원래 'A+'을 주지 않는 분으로 유명했다. 대체 이게 뭔가 싶은 심정으로 아이폰 4의 액정을 한참 쳐다보고 있었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때, 이건 꿈이 아니라는 듯 이어진 교수님의 말이 정적을 깨트렸다.
"다음 학기에 전액 장학금 받겠네."
'장학금? 내가?'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군대를 전역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동안 스스로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긴 했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냐고 물어본다면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완전히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전에 없던 마음가짐으로 복학에 임했다. 그 영향으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특별한 계기가 없었음에도 교수님이 내어주는 과제 하나하나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진 않았다. 애초에 '좋은 성적'이란 내 인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단지 교수님이 던지는 알쏭달쏭한 말들의 저의를 직감적으로 알 것 같았고, 그에 응당한 답을 미숙한 작품으로나마 제출한 게 내가 한 일의 전부였다. 그래서 성적표를 들여다볼 생각을, 학기가 끝나고 방학에 접어들 때까지 하지 못한 것이었다.
멀쩡한 책상 하나 없는 헐겁고 푸석한 빈 강의실에서 외롭게 혼자 공부하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최고의 답을 찾진 못하더라도 최선의 답을 내보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과제에 매달렸던 노력들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까지 몰두하게 만들었을까.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까지 몰입했을까. 나란 사람은 애초부터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인 건지, 근래에 경험한 일들이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자극하여 일종의 각성을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때의 경험이 훗날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인생에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를 경사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에 한아름 기쁨을 만끽하진 못했다. 그저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내내 맴돌 뿐이었다.
'내가 그 안수진을 이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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